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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고 책 Jul 12. 2022

드라마 ‘안나’의 원작 소설,
정한아 ‘친밀한 이방인’

어쩌면 모든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


솔직히 고백하자면 거짓말이라면 나도 쫌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때 나는 성당을 다니고 있었다. 그전까지 우리 집에 종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교회라면 일 년에 두 번 크리스마스 몇 주 전부터 나가기 시작해 당일에 푸짐한 과자 보따리를 받고 끝나는 것과 여름 성경학교에서 자두 일곱 개를 받을 수 있을 때나 찾아간 게 전부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즈음에 우리 가족 모두가 성당을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성당에서 정말 천사처럼 착한 친구를 만나 그 친구를 감쪽같이 속였었다.)     

 

그 친구네 집은 반듯하고 깨끗한 시영 아파트였다. 그 집에 놀러 가면 친구 어머니는 차가운 보리차에 롤케이크 한 조각을 내주셨다. 시원한 보리차에 달콤한 롤케이크의 환상적인 궁합. 

나는 지금도 이 조합을 좋아한다. 


친구의 방은 그때까지 내가 구경한 방 중에서 가장 좋았다. 책상이 있고, 침대가 있고, 창문에 커튼도 걸려 있었다. 함께 방을 쓰는 여동생마저 착하고 사랑스러웠다.      

다른 학교였지만 매주 주일에 만나 미사를 보고 주일학교를 함께 다니면서 우리 둘은 친구가 되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정말 착했던 이 친구는 처음 온 나를 배려해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던 것 같다.) 

우리는 종종 미사가 끝나면 친구네 집에 들러 함께 숙제를 하거나 친구의 동생들까지 불러 부루마블 게임을 하거나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았다. 

친구네 집은 그 당시 내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밝고 따뜻하고 행복한, 꼭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다음엔 너희 집으로 놀러 가자. 넌 어디 사니?”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엄마가 아파서 친구가 오는 걸 싫어하셔” 

역시 마음이 착한 친구는 내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네 집에 자주 놀러 가면서 그 아파트의 단지를 자세히 알게 됐다. 

워낙 큰 규모라 친구네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동도 있었고, 그렇게 먼 거리면 그곳에 우리 집이 있다고 해도 친구가 믿어주리라고 생각했다. 

다음번 친구가 어디에 사냐고 물었을 때, 미리 살펴봤던 동을 얘기하며 다음에 놀러 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친구는 눈이 동그래지며 진짜 그 동에 사느냐고 확인했고,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다는 친구의 거절에는 끝까지 온갖 핑계와 거짓말로 둘러대곤 했다.  

    

나의 거짓말로 인해 나 스스로가 그 친구와 멀어지던 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그 집에 찾아갔는데 너희 집이 아니라고 하던데?”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참 뜸을 들였다. 

고민에 빠진 나에게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렵게 첫 입을 떼어냈다. 

“사실 우리 아빠 부도났어. 그래서 급하게 이사 갔어. 우리 이 동네에 안 살아” 

부도라는 게 어떤 말인지 그 뜻도 알지 못했을 친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친구로 지낼 수가 없게 되었다.      


모든 게 거짓은 아니었다. 당시 아버지는 변변한 직업이 없었고 우리는 부도난 집 못지않게 가난했다. 엄마는 사실은 마음도 아프셔서 늘 짜증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계셨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한 번도 친구를 집에 데려간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이런 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수지가 그려낸 드라마 ‘안나’를 보지는 않았다. 다만 거짓말로 다른 인생을 산다는 설정에 호감이 생겨 원작 소설을 찾아봤는데 내가 좋아하는 정한아 작가의 작품이었고, 이 작품이 세 번째 장편 소설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았으니 드라마와 원작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소설 속에서 주인공 유미가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그 순간을 담은 내용이 무척 인상적이었고 또 충분히 공감이 됐다.      


내용은, 거짓으로 여대생 흉내를 내다 만난 첫사랑과 헤어지고 이번엔 피아노 강사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던 그녀가 같은 건물의 은행 직원과 만나게 되는 부분이다. 이전에 유미는 그 은행원에게 건물 화단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는 경고를 받은 상황이었다. 기분이 상했지만 유미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 은행원은 마침내 그녀를 찾아가 피아노 수업을 받게 되는 장면이다.      


피아노가 있는 교습실에서 여자를 기다리는데, 가슴이 뛰더군요. 어린 시절 이후로 그렇게 손에서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한 건 처음이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여자는 생각보다 더 키가 커 보였어요. 좁은 교습실 안이 그 여자의 존재로 가득 차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담배는 어디서 피우세요?”
“.... 끊었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나에게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리더군요.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녀와 하이파이브를 했죠. 우리는 함께 웃었고,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잘 웃는 여자였어요. 얼마 안 지나 테이트 신청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흔쾌히 수락하더군요.      


소설 속 주인공 유미는 절대로 시원시원하고 잘 웃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음습한 데다 항상 기가 죽어 있어서 소리 내 웃는 법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상대에 따라서 이렇게 한 순간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삶 자체를 고칠 수 있다면 만약에 내가 그 자리에 유미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도 시원시원하고 잘 웃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늘 되고 싶었을 테니까. 


물론 이 한순간의 선택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새로운 거짓말을 날마다 만들어버리다 당연하게 파국에 이르게 된다. 


유미가 네 번째로 다른 사람이 되는 걸 선택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이번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간호조무사를 준비했지만 어디에서도 직장을 구할 수 없게 됐을 때였다.     

 

그녀는 다시금 위조 전문가를 찾아갔다. 몇 년 새 그는 사무실을 두 배로 넓혀 이전했다. 이유미는 가정의학과 졸업증명서와 노인건강 학회 인증서를 구매했다. 의학 학위는 가격이 더 높았는데, 이유미는 단골 디스카운트를 적용받았다. 
실버타운에 지원서를 내자마자, 이유미는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공짜 숙소에 공짜 밥, 게다가 생활비까지 지급되는 자리였다. 지금껏 그녀가 받았던 연봉 중에서 최고치였다. 하지만 꼭 그 때문에 위험천만한 가짜 의사 놀음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돈은 중요한 요소였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고,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그 불가능해 보이는 욕심이 그녀를 자꾸만 무리한 사칭으로 몰고 갔다.      




누구나 다 유미처럼 간 큰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나 역시 내가 만들어낸 자잘한 거짓말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일을 몇 차례 겪고 난 후에는 차라리 솔직하게 사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물론 솔직하게 살아간다는 게 꼭 100퍼센트 진실한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나 솔직의 척도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상대방의 거짓말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자신의 착각으로 인해 더 쉽게 오해의 늪에 빠진다는 것도)    

  

드라마 덕분에 미처 읽지 못하고 지나쳤던 정한아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된 게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하고 싶다. 드라마에서는 다루지 않은 보석 같은 내용들이 너무도 많은 작품이다. 그래서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이 소설의 반전은 유미의 삶이 아니라 유미의 삶을 관찰하고 있는 작중의 화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쟁이로 거짓된 삶을 어느 정도는 살아가고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이 왜 ‘친밀한 이방인’인지 공감하는 순간이 진정한 반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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