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위생에 대한 생각
몇 년 전만 해도 엔드 그레인(end grain) 도마를 샀다고 자랑하면 ‘도대체 그게 멍미?’하는 눈으로 주변에서 쳐다봤었다. 하지만 나 혼자 사는 모 tv 프로그램에서 연예인이 사용하는 장면 한번 나오니 이제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지도가 넓어졌다.
나는 기물 덕후답게 기물 광고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 나무 도마 광고에 항상 빠지지 않는 ‘나무 도마는 세균 번식을 억제하여 위생에 좋다. 플라스틱 도마는 칼질을 하면 균열이 생겨 그 안에 세균이 번식한다.’는 말이 나온다. 꽤나 과장이 심하긴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 신경도 쓰지 않고 넘어갔다. 그런데 업장 후배 하나가 ‘우린 왜 위생에 좋은 나무도마를 사용하지 않고 플라스틱 도마를 사용하나요’라는 질문을 하는 거 아닌가. 차분 차분 질문에 답변을 준 후, 혹시나 해서 주변에 질문을 해보니 이 주제에 대해 아예 모르거나 왜 나무를 호텔에서 금지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우선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 한국에는 식품위생법이 있고 그 기준이 확실히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고객들에게 식중독 등의 위생사고 문제가 생기지 않는 기준을 과학적으로 수치화시켜 놓은 것이다. 자의적인 판단으로 나무가 위생에 좋네 마네 하는 소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위생 기준은 일반 개인 업장이나 가정에서는 기준에는 맞추기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까다롭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 나오는 처참한 수준이 아니라 ‘난 정말 깨끗하게 식당 운영하는데?’라고 자부할 정도도 열심히 쓸고 닦는 레스토랑 있다고 하자. 하지만 이러한 레스토랑 조차도 갑자기 식약청 검열이 나오고 상기의 기준을 철저하게 준수하여 검열한다면 10곳 중 9곳은 치명적인 지적사항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식품업체나 호텔 등은 개인 레스토랑과 달리 식약청에서 정기/ 비정기 점검이 나오고 상기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맞추기 힘든 기준’으로 철저하게 검사를 한다. 호텔에서 처음 일하는 신입들이 제일 이해를 못하고 제일 익히기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이 정도까지 해야 한다고요??? 왜)
다른 것은 제외하고 도마의 위생 기준은 무엇일까? 몇 가지가 있지만 기본은 ATP 검사이다. ATP (Adenosine Tri- Phoshate) 기기는 위생상태 오염 측정 장비이다. 검사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특수 면봉으로 도마를 닦은 후 기계에 넣어 수치를 검사하면 10초 안에 결과가 나온다. 식약청 기준으로 수치가 RLU 200을 넘으면 위반이다.
문제는 일반적인 관리(수세미 + 퐁퐁으로 씻고 말린)를 한 도마로는 저 기준을 절대 만족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나무도마는 기준 충족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호텔 등에서는 나무 도마, 칼의 나무 손잡이 자체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이 글은 실사용 한 도마를 기준으로 한다. 개인적인 궁금증으로 6개월 이상 사용한 나름 관리가 된 나무 도마(주기적으로 사포-오일링-말리기)에 atp 검사를 10번 진행했지만 모두 다 기준을 상회하는 수치가 나왔었다. 분명히 편백 나무 등은 위생에 좋다고 하던데 수치가 조금 충격적이었다. 무엇인가 이상하여 논문들을 찾아보았다. 적어도 내가 찾아본 논문들의 특징은
1) 새로운 도마를 2) 일관성 있는 결과를 위해 멸균을 한번 진행한 다음 3)세균을 배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적어도 현장에서 사용되는 칼집이 나고 물에 젖고 채소나 고기 등을 썰었던 몇 달 이상 사용한 도마 기준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겨우 한두 번 사용한 새로운 도마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사용했거나 해야 하는 도마를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엔드 그레인 도마로만 한정하면 틀린 말일 수도 있다. 고급 엔드 그레인 도마는 나무의 특유의 결과 단단함 덕분에 칼집이 덜난다. 문제는 일반 업장에서 그런 10~20만 원이 넘는 비싼 도 마를 사용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도마 10개면 최소 100~200만 원? 와우)이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1만원 이하 가격대의 나무도마를 사용한다면 플라스틱 도마보다 훨씬 더 자주 쪼개짐이나 칼집이 잘생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플라스틱 도마는 칼집이 많이 나면 폐기시키고 새 걸로 사용하면 끝이다. 괜히 관리하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다.
이 특성은 특정한 요리를 만들 때 매우 좋다. 여분의 수분을 흡수하는 특성 때문에 피자, 파스타 반죽 등을 만들 때 도마를 활용하면 세밀한 퀄리티의 반죽을 만들 수 있다. 생선 등 미끄러운 재질의 식재료가 도마에 단단히 붙어서 썰기가 좋다. 하지만 그 흡수력이 위생에서는 치명적이다. 수분 흡수력이 좋아서 김치나 고기 등을 썰면 그 액체가 도마에 흡수되어 위생에 좋지 못한 결과를 낸다. 김치 한번 썰은 나무 도마는 사용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얼룩이 생긴다. 잘 말리지 않으면 수분 때문에 곰팡이가 생기는 경우까지 있다.
플라스틱 도마는 어떨까? 플라스틱 도마라면 간단히 락스 희석 물로 세척하면 깨끗해지지만 나무도마는 락스를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의미는 위생에서 2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첫 번째는 식기세척기에 넣고 돌리면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의미이다. 호텔에 일하던 디시 워셔가 했던 대화이다.
“조리장님. 나무 도마(플레이팅용)를 식기세척기에 돌리면 도마가 다 망가지지 않을까요?”
“네 망가지는 거 저도 아는데요. 우리 호텔의 위생기준상 식기세척기 최종 온도 기준인 82도까지 올라야 세균이 죽습니다. 고객이 위생상 문제가 안 나는 게 더 중요해요. 그냥 돌리세요”
참고로 플라스틱 도마는 식기 세척기에 돌려도 문제가 없다. 그 82도 이상의 온도를 견디도록 제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도마 건조기에 넣으면 나무도마가 쪼개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도마 건조기는 식품위생법 가이드에 의하여 40도의 온도로 세팅되어 있다. 빠른 온도로 도마를 건조하여 세균 번식을 억제하는 원리이다. 아무리 나무도마가 세균 번식을 억제하는 능력이 있다고 수분이 가득한 상태에서 활성되는 세균에는 의미가 없다.
그럼 나무 도마 판매상들의 이야기는 전부 거짓일까? 그건 아니다. 고급 나무도마는 관리만 잘하면 평생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문제는 식약청 기준의 위생점검을 통과하려면 오염물이 생길 때마다 사포를 200-400-600방으로 칼집과 얼룩 등을 제거하고 오일을 먹이고 2일 정도 말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가 있는 부분을 모두 긁어낼 수만 있다면 위생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 일이 그렇게 여유 있지 않다. 요리만 하기도 바쁘고, 사실 플라스틱 도마 조치도 제때 교체를 안 해서 잔소리 듣기 일수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염물을 사포로 긁고 오일 질을 하라는 것은 밥도 먹지 말고 도마 관리하라는 소리인데 현실적이지 못하다.
대부분의 도마 판매자들은 나무를 평생 만져 오신 분들이니 ‘그 정도가 뭐가 힘들다고?’라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집에서 히노끼, 엔드 그레인 나무도마를 관리하고 있지만 분명히 별일이 맞다. 한두 번 하는 것은 호기심에 가능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취미가 아닌 이상에야 엄청난 인내심과 관심이 필요하다.
내가 말한 상기의 기준은 레스토랑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도마도(나무건 플라스틱이건) 어지간히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으면 식약청 기준을 상회한다. 장담할 수 있지만 1년 이상 매일 사용한 도마 기준으로 100가구를 검사하면 99가구는 기준을 넘을 것이다.
나무도마가 플라스틱 도마보다 더 위생적이다? 관리에 따라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애지중지하면서 김치 등은 안 썰고 문제 있는 부분을 전부 사포나 기구 등으로 샌딩 하면서 오일 작업을 꾸준히 하면서 응달에서 잘 말리면서 사용하면 말이다.
하지만 간단히 식기 세척기에 넣어서 82도 이상으로 세척하고, 40도의 도마 건조기에 넣어서 말리는 플라스틱 도마가 더 위생적일 수밖에 없다. 간간히 락스등으로 깨끗하게 세척도 가능하다. 특히 수명이 다하여 미련없이 교체하면서 사용하는 플라스틱 도마가 관리도 더 편하고, 더 위생적이다. 무엇보다 매우 현실적이다. 괜히 호텔 등의 대기업에서 나무도마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