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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OVICH Dec 27. 2019

영화 청후감

영화<미성년>-근거와 증거가 남겨둔 질문들


 2001년 가을 어느 날 , 신촌에 한 카페에서 서빙을 하던 시절.
구석진 테이블에 모여 앉은 일행들의 토론 중 본능에 철저히 위배된다며 일부일처제의 잔인성에 대해 성토하던 한 여교수의 인상이 강산이 두 번 바뀌려는 지금까지 옅어지지 않는다.
 
영화 <미성년>을 보고 있자니 당시 급진 적여 보였던 그녀의 주장에 일정 동의가 일었는데 그렇게 들여다본 이 시대의 가족이란 제도는 너무도 연약하다.
 
기본적으로 복수(複數) 여야만 온당할 것 같은 가족의 형태가 여러 변이를 거치며 파격적으로 1인에게 ‘가구‘라는 작위를 내려주기에까지 이른 지금.
’불륜‘ 은 창작의 소재로서 더 이상 참신하지 않다.
 


영화 <미성년>은 그렇게 불륜의 전형성에 시야를 가두지 않고 그것을 일상의 한 단면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막장의 DNA가 가득한 소재에서 출발 하지만 치정을 발판 삼은 과잉된 메시지나 자극적 설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군가의 집이 지옥이 되는 상황이 보는 이에겐 촌극으로 여겨질 만큼 가벼운 터치로 이야기를 끌고 나아가는데,
유쾌하기까지 한 극의 리듬은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본질이 갈등 극복의 카타르시스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극 중 이미 균열이 시작된 양 가정의 구성원들은 답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며 무기력하게 빈 답안지를 들고 나올 뿐이다.
가벼운 잽 한두 방에 그로기로 치닫는 허약한 집구석이 한심스러워 실소가 흘러나올 테고 , 누군가는 그것이 못 미더워 헛심 빼기 전에 일찌감치 링 안으로 손에 쥔 수건을 던지고 싶어 질지 모른다.
 
영화 <미성년>은 그 공허한 탄식을 곳곳에 새겨 놓았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어른들이 벌여 놓은 어지러운 판을 수습하려는 두 소녀의 고군분투인데 이들은 자신의 가치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않고 각자의 소신대로 움직이지만 경험치가 충분치 못한 시야와 결정력은 극 후반부에 불안정하고 미숙한 선택과 행보를 보이며 쉬이 공감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결국 초반의 안정된 주행에 점차 제동이 걸리고 다소 폭력적이고 산만한 설정들이 잘 형성되어 가던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며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 이들의 이러한 돌출 행동은 역설적으로 우리 곁의 미성년자들이 보호받아야 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의 몇몇 실투에 대해 감점하기 전에 그런 상황과 설정 자체가 결국 제대로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사투의 상흔으로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까지 상황 수습에 몰두하는 미성년 자녀들과는 대조적으로 불륜을 저지른 대원(김윤석)에게 사랑이었냐 성욕이었냐는 관습에 가까운 물음을 던지는 영주(염정아)는 남편의 외도를 인지한 후 분노와 극단적 행보를 보이기보다 참회와 한탄 속에서 가족의 끼니를 염려하는 주부의 책임까지 소홀히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은 그녀가 초월의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봉착한 문제를 해결할 대응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대책도 없이 막연한 의지로 출산을 감행하려는 미희(김소진)까지 극 중 사회적으로 보호자의 위치에 있어야 할 어른들의 미숙한 행태가 내내 이어지는데 심지어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대원(김윤석)은 그 헛발질의 선두에 서있다.

결국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연식과 관계없이) 제목처럼 모두 <미성년> 들인 것이다.
 
 경력의 대부분에서 발산하는 에너지와 무게감으로 장면을 압도해온 배우 김윤석은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절제된 연기에 대해 늘 고민하고 지나침에 대해 경계해 왔는데 연출가로서의 이번 작업에서도 그 절제에 집중하며 경제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그의 감독 데뷔작인 영화 <미성년>을 향해 항간에 언급되는 ‘올해의 발견’이라는 촌평에 역시 한 표 던져본다.
 
영화 <미성년>의 빛나는 성과로 배우들의 연기와 앙상블을 꼽는 데에 큰 이견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검증된 관록의 배우들과 함께 이번 영화를 통해 소개되는 새로운 얼굴들 역시 안정된 자기 호흡을 유지하며 성실하게 움직여주고 있기에 관객들은 영화가 던져주는 대부분의 상황을 이물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떤 야심으로 가득 찬 이야기는 못 될 것이지만 그려 놓은 과녁을 이탈하지 않으며 여러 갈래의 상황들이 효과적이고 소소하게 나열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서 배우이자 연출가를 넘어 각본가로서의 김윤석의 역량도 주목하고 싶다.
 
일가를 이룬 배우가 연출로 전향하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광경이지만 명성에 정비례하는 결과물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은 그 외도에 대한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본업인 배우로도 극 속의 여러 꼭지를 연결해가며 앙상블을 생성해 내는데 선수 겸 감독이라는 멀티 포지션의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준비된 좌석에 비해 많은 승객이 끼어 앉은 느낌을 지울 순 없지만 번호표를 나눠 받은 배우들이 자기 순서에 맞춰 소란스럽지 않게 등퇴장을 이어간다.
그렇게 소박하지만 일일이 일으켜 세워준 캐릭터들은 훌륭하게 조리된 밑반찬이 식탁을 어떻게 풍성하게 해 주는지를 기분 좋게 증명해주고 있다.
 
배우들 중 김소진의 인상이 강하게 남는데 너무 화가 나서 온 세상과 싸우고 싶을 만한 난국에도 꼿꼿하고 단정하게 버텨 나가던 극 중 미희의 상실과 숨죽인 신음을 섬세하게 체화해낸 김소진은 그 심정 한가운데 지점에서 더할 나위 없는 인물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여러 작품에서 그 존재와 신뢰를 확인시켜주었지만 <미성년>에서의 김소진은 더욱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내연남의 아내인 영주에게 “바람 한번 피워 보라. 그게 생각대로 잘 안 된다”며 나직이 푸념하던 미희가 , 마치 ‘사랑‘ 해봤냐고 물어보는 듯했다.
 
영화의 종반부까지 잔뜩 엉킨 실타래를 후련하게 풀어내지는 못 하지만 갑자기 내리는 눈을 보며 가족을 향해 발길을 돌리고 매몰차게 집을 떠나려다 쓸쓸히 혼자 라면을 먹는 엄마에게 김치를 내놓는 두 딸을 보고 있자면 영 시원찮은 가족이란 불량주를 당장에 손절하는 것은 조금 성급해 보이기도 한다.

복잡했던 심경이 일순간 정리되는 것처럼 헐거워 보이지만 그들의 끈은 질기며 해빙의 순간도 김치 한 접시처럼 단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대 급 태풍 주의보가 있던 날 대로변의 쓰레기통들이 눕혀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강한 바람에 쓰러진 건가 했는데 그 다음번의 것도 가지런히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다가올 강풍에 미리 대비한 것임을 알았다.

태풍을 멈출 수 없고 그 많은 쓰레기통을 치울 수도 없을 테니 적절한 타협점인 듯했다. 그러면서 생의 경로를 예측 수 없는 우리에게도 태풍이 지나갈 자리가 필요할 듯싶었다.

강한 바람에 휘청이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의 현자도 실수하고 흔들리고 넘어지기까지 한다. 성숙이란 도달할 수 있는 실제의 개념이 아니지 싶다.

매년 태풍은 올 것이고 삶은 살아내야 하기에 사는 동안 미성숙으로 남아있을 우리가 버거운 짐을 버티지 못해 주저앉은 모습이 더 누추해지기 전에 어디선가 전화 한 통이 울리고 위로의 손길이 내밀어 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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