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여행가방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여행 가방을 꾸렸다. 2012년, 처음 승선하며 샀던 25인치 엘르 캐리어는 이젠 원래의 쨍한 빨간 색감을 잃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꼴을 하고 있다. 그래도 오래 입은 잠옷처럼 편한 탓에 열심히 수선을 해서 잘 끌고 다닌다. 승선과 하선을 수도 없이 했고, 공항이 집 앞 버스정류장처럼 편하게 느껴질 만큼 여행을 했는데도 아직도 여행 가방만 보면 설렌다. 어떻게 생각하면 '여행'이라는 전체적인 여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여행 전 날 짐을 꾸릴 때인 것 같다. 짐을 쌀 때의 나만의 리츄얼이 있다면 먼저 방 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비트가 강한 경쾌한 음악을 트는 것이다. 깨끗한 바닥에 빈 캐리어를 펼쳐놓고 차곡차곡 채우기 시작할 때의 그 쾌감이란!
가방을 채우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차곡차곡 접어 넣기, 돌돌 말아 넣기, 신발 안의 공간까지 최대한 활용해서 쑤셔 넣기, 수건이나 스카프는 마지막에 펼쳐 넣기 등 다양한 수법들이 있다. 공항에서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다른 가방들 사이에서 내 가방을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손수건을 묶거나 색깔이 있는 띠를 가방에 두르는 것으로 짐 싸기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하게 싸서 고이 보낸 가방이 중간에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여행하는 일주일 내내 맨 땅에 헤딩해야 한다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 같지만 사실 여행을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심심찮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크루즈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게스트들이 탈 때마다 항공사에 의해서 가방이 제때 도착하지 않은 게스트는 두세 명씩 꼭 있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조금 세심하게 가방을 싸는 팁을 공유하고자 한다.
반반의 법칙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 진리이듯이 짐을 쌀 때도 반반의 법칙이 있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여행할 경우 두 개의 가방에 서로의 짐을 반씩 나누어 넣는 방법이다. 혹시라도 가방 하나가 제때 도착하지 않는 상황에 그나마 반이라도 건질 수 있으며, 여행하는 동안에도 심리적으로도 안심이 된다.
혼자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작년에 가방 두 개를 체크인했는데 목적지인 멕시코시티에 도착하니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가방 하나가 나오지 않았다. 항공사 직원은 별 표정 없는 얼굴로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보더니 내 가방은 아직 샌프란시스코에 있으며, 다음날 와서 직접 가져가든지 아니면 배달로 받든 지 하라고 했다. 배달로 받게 될 경우 사흘 정도가 걸린다고 했는데 내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속옷을 비롯하여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 세안 용품, 화장품들은 죄다 그 가방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음날 ‘혹시 도착할지도 모르는’ 짐을 찾기 위해 총 여섯 시간을 왕복할 생각도 없었다. 결국 나의 빨간 캐리어는 사흘 후 별 탈 없이 내 품으로 돌아왔지만 그 이후로는 공항에서 짐이 조금이라도 늦어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곤 한다. 요지는 가방 두 개에 속옷 반반, 잠옷 반반, 화장품도 반반 넣게 되었다는 것.
기내용 가방의 진정한 용도
체크인하는 23kg짜리 캐리어 말고도 기내에 가지고 탈 수 있는 캐리온 가방이 있다. 이 가방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혹시라도 체크인한 가방이 항공사에 의해 분실되거나 제때 도착하지 않은 경우, 이삼일 분의 갈아입을 옷과 세안용품을 따로 챙긴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운명은 천지차이이다. 일반 호텔이라면 2-3일 안으로 받을 수 있기라도 하지, 크루즈 여행이라면 더 복잡해진다. 배가 일단 출항을 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다음 기항지에서 가방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루즈의 매력은 바다여행이 아닌가? 첫 기항지에 도착하기까지 짧게는 이틀, 일정에 따라 길게는 일주일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 즉 배가 바다 위에 있는 동안은 가방을 받을 길이 없으며 배 안에서 살 수 있는 용품도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 그래서 크루즈 베테랑인 승객들이나 크루들은 캐리온 가방에 유니폼, 일주일치 속옷, 갈아입을 옷, 중요한 서류 등을 챙겨서 타는 지혜를 발휘한다.
가방을 잃어버린 채로 크루즈를 탔다면
먼저 공항에서 가방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고객센터에 줄이 길고 피곤해도 절대 그냥 공항을 떠나서는 안된다. 반드시 잃어버린 가방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고 항공사로부터 파일 넘버가 적힌 서류를 들고 나와야 한다. 다행히 호텔에 며칠 묵는 일정이라 가방을 받아서 크루즈를 타는 여유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냥 항구로 직행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면 도착하지 않은 가방은 어떻게 받아야 하며, 배 안에서 무슨 수로 항공사와 연락을 할까? 답은 간단하다. 크루즈에 승선하자마자 항공사에서 준 서류를 가지고 프런트 데스크(게스트 서비스)로 향하면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다. 놀랍게도 크루즈의 게스트 서비스 부서에는 잃어버린 가방을 전담하는 직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직원은 항공사와 수시로 긴밀하게 연락하여 크루즈 중간에 가방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다. 또 필요할 경우 항공사로 무료 통화를 할 수 있도록 연결해 줄 뿐만이 아니라 크루즈 중에 갈아입을 티셔츠와 세면도구, 무료 세탁 쿠폰을 제공해주기까지 한다.
가방이 망가진 상태로 객실에 도착했다면?
내가 친구들과 처음 크루즈 여행을 했을 때의 일이다. 객실 앞에 배달된 가방의 버클 부분이 망가져있었다. 터미널 앞에 손수 가방을 드롭할 때까지도 멀쩡했으니 분명 객실까지 옮겨지는 중에 잘못된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이 사실을 고객 서비스 부서에 알리고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사실 사흘 동안 신나게 노느라 배 안에 고객 서비스 부서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여행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부서진 가방을 신나게 가지고 내렸던 기억만 난다. 배 안에 가방 수리를 맡길 수 있는 곳이 있고, 수리가 불가능할 경우 선사에 따라 보유하고 있는 새 가방으로 교체해주거나 상황에 따라 현금으로 보상을 해주기도 한다는 건 추후에 고객 서비스 부서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니 가방이 도착하지 않았거나 망가지는 일이 생겼을 때 전전긍긍하지 말고 바로 도움을 요청하면 여러 모로 속 편하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게 부담이 되어서 프런트 데스크에 다가가지 못한다면 기억하자. 프런트 데스크의 스텝들은 이미 온갖 상황에 대해서 트레이닝이 되어 있고, 아는 단어 몇 개만 던져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처리해준다. 그게 아니라면 통역을 부르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당신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니 부담 없이 SOS를 요청하면 된다.
코로나 사태로 하늘길도 바닷길도 막힌 지금이, 여행을 다시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당신의 가방의 안녕을 기원해본다.
Written by Hong
@jayeonh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