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이야기
무더운 여름이다. 항상 2층에서 바라만 보던 정원으로, 일요일 한판 낮잠을 자고 난 뒤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보아야 해줘야 할 일이 눈에 보이기에 덥다는 핑계는 이제 그만 대야 했다.
지난주 텃밭을 정리했더니 텃밭은 반밖에 차지 않았다. 텅 빈 것 같지만 심은 식물들이 정리되어 한결 보기 좋았다. 혹시 지금까지 내가 욕심을 낸 건 아닐까. 가을부터는 가지 수를 대폭 줄여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 주기를 편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다양한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커피가루를 텃밭에 뿌리고, 바질 물꽂이도 밖으로 옮겼다. 올해 바질 수확은 작년보다 적어 바질 페스토를 한 통밖에 만들지 못했다. 종류가 줄어든 텃밭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화분의 바질과 토마토를 땅으로 옮겼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남은 기간 동안이라도 잘 자라주기를 바라며 삽으로 흙을 깊게 파주고 물도 흠뻑 줬다.
지난주에 누워있던 가지 줄기를 세워줬더니 가지 열매가 금방 자라 있어 5개나 땄다. 지난주 많이 잎을 정리해 준 덕분에 아스파라거스 새순이 보여 3개나 잘랐고, 비실비실한 쪽파도 수확했다. 내가 정하지 못해서 그렇지 텃밭은 이렇듯 나를 빈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다. 꾸준히 나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었다. 커피가루를 담았던 접시에 가지, 쪽파, 아스파라거스를 담았다.
벌레와 거미, 그리고 여름의 생태계
다 정리하고 딱 2주만 남긴 오이와 브로콜리는 가까이서 보니 무당벌레와 노린재가 점령해 있었다. 잎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물을 뿌려 벌레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올해는 정원 전체에 유난히 거미줄이 많았다. 거미줄을 치워봤자 거미를 죽이지 않으면 다시 생기기에 그냥 두었다. 순간, 노린재와 무당벌레를 잡아 거미줄에 붙이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화단과 꽃들의 이야기
지난주에 묶어둔 목수국은 만발했다. 작년에 막연히 수국을 모아서 수국존을 만들어야겠다고 했던 생각이 잘 통했다. 그냥 수국은 꽃이 없었는데 목수국은 많이 폈다. 내년에도 구역을 더 늘리고 외목대를 만들어 키도 키워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다. 키우기 쉽고 꽃도 큰 수국은 나와 잘 맞는다.
동그라미 화단도 볼 만했다. 키 큰 버들마편초가 우수수 피어 존재감을 발휘했다. 원래 계획이었던 메리골드는 선전하지 못했지만, 플랜 B가 잘 들어맞았다. 메리골드가 아무리 많이 피었어도 키가 작아 이런 존재감을 내진 못했을 것이다. 정원에서 깨달은 진리, 흔한 꽃이라도 모여 있으면 아름답다는 말은 여기서도 틀리지 않았다. 나비가 날아와 버들마편초의 보라색 꽃을 즐겼다.
잡초와 정비
긴 화단으로 가서 잡초를 뽑았다. 잡초 매트를 깔아 잡초가 날 만한 구역을 미리 줄여두니 훨씬 정리가 쉬웠다. 그래도 처음 보는 잡초가 퍼지는 걸 보면, 내년에는 더 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벽돌은 가격도 저렴하고 미적으로도 예뻐서 화단 정비용으로 더 놓고 싶어졌다. 정원 가꾸기 초반에는 어떤 식물이 있냐를 많이 봤는데, 이제는 어떤 식물 보다도 어떻게 되어 있나 가 더 크게 보인다. 이제는 굳이 특이하고 귀한 식물을 원하지는 않는다. 내가 식물을 얻어올 수는 있지만 생명력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 정원이라는 공간을 관리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더 고려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제는 자연과 환경이 결정하고 나는 어느 정도 조정을 해주는 중간 역할일 뿐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이렇듯 내가 제일 힘들어하는 계절이 여름이지만 가장 극한의 상황이기에 이런 경험이 정말 소중하고 지금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귀한 것임을 알았다.
퇴비와 정원의 뒤안길
지난주에 쌓아둔 식물 쓰레기는 비가 한두 번 내린 뒤 벌써 썩고 공벌레가 나타났다. 퇴비장으로 쓸 구역에 옥수숫대, 방울토마토 줄기, 셀릭스 가지치기한 것까지 옮겨 놓았다. 이렇게 더운 날에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정원에 퇴비공간을 마련해 놓은 것이 정말 잘한 일 같았다. 일반 쓰레기로 버릴 것들은 비닐에 따로 담았다. 가장 귀찮은 작업이지만 이것 또한 정원의 일부라 받아들였다. 벌레가 잔디에서 튀어나온다. 모기가 얼굴에 붙고 옷 안으로 땀이 흘렀다.
장미, 성실한 여름의 꽃
이쯤에서 마무리로 식물들에게 물을 주었다. 장미 잎에는 여러 병이 퍼져 있었지만 급히 떼어냈다. 지난주부터 아침저녁으로 더위가 한결 꺾인 덕에 장미 ‘헤르초긴’, ‘노발리스’에 봉오리가 여러 개 맺혔다. 덩굴장미 자스미나에는 보지 못했던 새 슛이 솟았다. 장미는 꽃은 작지만 정말 성실한 식물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물을 가득 주었다.
땅에 심은 빨간 장미는 꽃다발을 세 무더기나 피워내어 행복했다. 작년에는 빨간 꽃이 분홍 꽃 바로 옆에 있어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단독으로 보니 기품 있는 꽃이었다. 무더위 속에서도 당당히 불타오른 장미가 지고 있다. 잘라 거꾸로 말렸다. 드라이플라워가 되어도 장미는 끝까지 아름다웠다.
밀리언 벨의 부활
물을 주다 보니 다시 살아난 꽃이 눈에 들어왔다. 봄에 화원에서 사 온 밀리언 벨이었다. 더위에 죽어가는 듯했지만 물 한 병을 먹고 대기해 두었던 핑크 꽃을 다 피워냈다. 관리 대비 꽃 가성비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4월부터 8월까지, 방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꽃을 보여준 충실한 존재였다. 장마와 고온건조를 이겨내고 다시 소생한 모습에 ‘영혼의 꽃 단짝’을 만난 듯했다. 현관 앞 화분에는 앞으로 이런 꽃을 심어야겠다. 예쁜 공간을 꾸리는 카페 주인이 된 것처럼, 눈에 잘 띄도록 빈 화분 위로 올려 키를 키워주었다.
4월에 산 모종도 거의 죽고, 5월에 심은 텃밭 식물도 힘없이 사라졌는데, 밀리언 벨은 최장수에다가 꽃 보여주기라는 본분에 가장 충실했다.
여름 가드너의 옷차림
나의 정원 차림은 장화, 모기장 옷, 챙이 긴 모자, 장갑, 그리고 가위. 이렇게 온몸을 보호하니 얼굴도 타지 않고 모기도 덜 문다. 덕분에 안전하고 편하지만, 단점은 아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민망함이다. 생활인의 모습 그대로이기에 더 그렇다.
보통은 못 입는 옷을 입고 나가면 딱 좋은데, 여름은 덥다 보니 여러 겹 껴입기도 어렵다. 그래서 여름 가드닝은 여러모로 쉽지 않다.
마무리
여름은 내겐 가장 힘든 계절이지만, 그 속에서 얻는 경험은 소중하다. 정원은 여전히 나에게 무언가를 내어주고 있고, 나는 그 속에서 귀한 아이디어와 작은 위로를 얻는다. 땀과 흙 속에서 뚫고 나오는 이 강렬한 순간들이야말로, 여름 정원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