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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정원 Oct 22. 2023

장마가 휩쓸고 간 텃밭과 화단

단독주택 살아보니 #20

 올 여름은 유난히 덥고, 비가 많았다. 정원을 갖게 된지 이제 2년째지만, 이상 기온의 영향인지 2023년의 여름은 작년과 식물들이 사뭇 달랐다. 주변에 식물가꾸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올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숨막히는 거대한 수조안에서 식물도 인간도 힘겹게 버틴 것 같다. 로즈마리, 라벤더, 마가렛, 페튜니아까지 아무리 신경써도 족족 죽어가는 생명이 참 속절 없었다. 죽지 않은 목수국은 볼품 없는 꽃을 피워 올리고 말았다. 더위가 한 풀 꺾이고 고인 빗물이 다 빠져서 정신차리고 보니 식물들이 죽고 녹아내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냥 사라져 버렸다. 전체적으로 정원에 꽃이 실종되고 빈자리가 늘었다. 이제 살아남을 놈만 살아 남았구나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고 이 빈 칸을 어찌 채워야 할까의 생각으로 옮겨갔다. 빈칸에는 잡초가 자리를 잡으니, 빈칸을 없애는 것이 나의 큰 목표가 되었다.

 화원에 달려가보니 화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든 식물을 다 키워내실 것 같은 화원 사장님도 날이 더워서 꽃이 없다며 더 시원해지면 오라신다. 결국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면 화원에서 식물을 사와서 심었다고 하루 이틀은 예쁘겠지만 길게 잘 자란다는 보장도 없었다. 비어있는 축축한 땅에서 정신없이 자라나던 잡초를 뽑아내다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식물들에게 눈길이 갔다. 잘 되는 식물을 늘려나가지 싶었다.많은 비를 겪었지만 죽지 않고 키가 멀대같이 커서 꽃을 달아낸 백일홍 줄기를 잘랐다. 군데 군데 잘라 생장점을 땅에 묻었다. 일명 흙꽂이 번식인 데 될 지 안될 지 찾아볼까 하다가 인터넷 검색창 속 의견보다 내 눈 앞의 생명의 현장을 믿어보기로 하고 바로 진행했다. 잘 되던 식물인 버들마편초, 바질의 줄기를 잘라서 바로 옆의 빈 땅에 꽂았다. 키다리 백일홍 2주는 십 여개의 미니 백일홍이 되어 꽃 망울을 달기 시작했고, 바질도 귀여운 꼬마 바질을 내주며 새 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버들 마편초도 난쟁이지만 또 한번 왕성히 자라날 시동을 걸고 있었다. 잡초 대신 군락을 이루며 피어날 버들마편초와 백일홍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니 마음이 뿌듯했고, 한 달 뒤, 자라나는 바질 잎을 모두 수확하여 맛있는 바질 페스토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현실을 외면하고 상상이나 멀리 있는 것을 쫓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이미 가진 것은 시시해 보이고 제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내가 가진 능력이든, 새롭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이 좋아보였다. 하지만 계절과 땅과 기후가 만들어내는 하모니인 정원 앞에서 내 곁에 자리 잡은 생명을 소중히 하고, 거기서 만족을 얻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내가 가지지 못했던 환상 속의 식물이 아닌 내 마당에 있던 백일홍과 버들마편초와 바질이 군락을 이루며 정원을 채워준다면 난 있는 그대로 행복할 것 같다.

 화단은 이렇게 한소금 마무리가 되었지만, 텃밭은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 집 텃밭은 지대가 낮은 쪽이라 물이 모여드는 위치에 있다. 화단은 비가 그치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 바로 마르는 데, 텃밭은 일주일 정도 웅덩이가 생긴다. 텃밭 작물들이 워낙에 자유분방하게 자라다 보니 그 웅덩이에 떨어진 감이며 호박줄기가 고인 물에 닿아서 썩어갔다. 젖어있는 흙에 묻혀 자라던 당근은 땅 속에서 물러버려 뽑을 수도 없게 되었다. 습한 데 썩는 냄새까지 나니까 텃밭 쪽은 쳐다보기도 싫은 지경이 되었다. 빛은 없고 물로만 적셔진 수확품도 볼 품 없고, 벌레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내가 전업 농부였으면 이 난리에 울고 싶었을 것이다.

축축한 텃밭위 바질 흙꽂이

 어느 주말 방치되는 텃밭을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과감하게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누렇게 마른 줄기가 되버린 오이와 호박 줄기를 모두 뽑고 지지대를 치웠다. 호박의 경우는 너무 빨리 자라면서 여기저기를 침범하고 엉키며, 만지면 까끌한 느낌이 있어서 키우기가 힘들었다. 봄에 무심코 심은 4개의 호박 모종에 1년 동안 호되게 당했다. 호박과 호박잎을 포기하고 모조리 뽑아서 잘라서 버렸다. 어찌나 큰 지 마대자루에 꽉차서 버리는 것도 힘들었다. 호박은 마치 동물같다. 청양고추, 당조고추도 노린재의 습격으로 시들해져서 뽑았다. 가지와 방울토마토는 덩굴식물이 되려는 지 길게만 자라고 엉켜서 열매가 적었다. 몇 개 뽑아서 화분으로 옮겨서 통풍을 좀 시켜주었다. 와중에 고구마가 잘 자랐다. 작년 음식물 쓰레기로 묻어놓은 고구마에서 싹이 나더니 꽤나 뻣어나가 덩굴을 이뤘다. 가을에 수확해 보니 수확물은 거의 없었지만 겉모습은 그럴 듯 해서 큰 기대감을 줬다.

그래도  피어난 가을 꽃

 이렇게 5월에 시작해서 9월 초까지 긴 장마로 올해의 텃밭 봄, 여름 버젼이 마무리되었다. 작년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 삼아 올해 키울 작물을 정했는 데 길어진 장마라는 변수로 예상과는 참 다른 텃밭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올 텐데 벌써부터 내년이 걱정된다. 화단에는 장마에 강한 수국이나 열대 식물인 파초를 심어 볼 생각이고, 텃밭은 쿠바식 틀밭처럼 지대를 높히는 식으로 보강을 해야 할 것 같다. 화단도 텃밭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내년의 기후에 또 적응할 고민을 하고 있다. 이처럼 올 여름은 많은 사람들에겐 아픔과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경고되었던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가 해가 갈수록 더 가까히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오는 듯 하다. 미세먼지부터 가뭄, 집중 호우, 폭염까지 이렇게 변화가 심해서야 우리 아들은 어떻게 자식을 낳아 기를까하는 걱정도 든다. 한반도도 동남아처럼 열대 기후처럼 변화할 것이고 인간도 식물도 모두 적응이라는 큰 과제 앞에 놓여있다. 화단과 텃밭을 정리하며 나는 인간과 자연이 의지하며 살아가야 함을 또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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