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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Gang Jan 24. 2020

“Congratulation Dr. Gang"

2 편에 걸쳐서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에서 면접을 보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미국 대학에서는 좋은 결과를 받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UNIST에서 합격을 한 것이다. 일단 본부 면접에서 통과를 했지만, 이사회 통과가 남아 있어서 지원자 입장에서는 도장 찍히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좋은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가서 지도교수님께 합격소식을 전하자 기뻐해주셨다. 그러면서 이제 박사논문 마무리를 잘하자고 하셨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경영분야의 경우에는 박사학위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교수로 임용되기도 한다. 미국에서도 박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Instructor 신분으로 뽑았다가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Tenure track faculty (Assistant Professor)로 신분을 바꾸어주는데 특히 미국에서 외국인 신분일 경우는 비자 문제가 있어서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진다. (물론 HR 오피스에서 도와주나 신경을 안 쓸 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내가 아직 박사학위를 받은 건 아니라 강사의 형태로 임용을 했다가 학위를 받고 난 이후에 조교수로 변경을 하게 된다.  


일단 합격 소식을 받고 (5월), 8월까지 논문을 마치고 들어오기로 한다. 아이까지 있었던 집에서 홀로 집으로 돌아와서 논문을 정리하려니 오만생각이 가득하였다. 아울러 빨리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고, 그때부터는 밤낮이 바뀌었던 것 같다. 미친 듯이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밥 먹고, 쓰고 고치고 가 반복되는 하루하루, 왠지 연필을 쓰면 잘 써지는 듯해서 연필을 쓰고 깎고 했는데 몇 개를 썼는지 모르겠다.  


박사라운지에서 한밤중에 쓰고, 오려붙이고 다시 데이터 돌리고..

학교, 도서관이 지겨울 때면 스벅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한국으로 짐을 보내야 해서 2009년 처음 박사와서 얼마 후 태평양을 건너서 넘어온 큰 짐들이 다시 한국으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 이 짐을 쌀 때, 아! 진짜 이제 한국으로 들어가는 건가 하는 시원 섭섭함이 들었다. 사실 그 다음에 한번 더 이사를 했는데, 그전에 첫째가 태어나기 전에 고생해서 이사를 했던 기숙사가 더 이상 패밀리 기숙사로 쓰이지 않게 되어, 학교에서는 다운타운 쪽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그것으로 다시 한번 이사를 하였다. 이 짐들이 또다시 태평양을 건너는 것이다. 한국 -> 미국 Albany (여기에서 두 번 더 이사를 하고) ->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더 웃긴 건 이게 끝이 아니었다는 점).


또 시원 섭섭함이 들었던 이유는 미국에서의 4년동안 경험이 힘들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와 영어, 생활은 한국과 너무 달라 쉽지 않았지만, 자연환경과 깨끗한 공기는 너무도 좋았고 학교 캠퍼스도 좋았다. 아울러 그러면서 그동안 발이 되어 주었던 차도 중고로 처분한다. 아! 진짜 이제 한국에 가는구나.


키를 넘기기 직전이었던듯

저 짐중에 반 정도는 나중에 미국에 다시 들어오게 된다는 슬픈 이야기가.


그렇게 짐을 대략 보내놓고 나니 이제 진짜 덩그러니 비워진 집에서 최소한의 물건들로 생활한다. 마치 미국에 처음 도착한 날과 비슷하다. 다만 그때보다는 조금 더 미국에 익숙해졌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고 드디어 디펜스 날자가 다가온다. 한국에서 석사를 할 때도 꽤나 큰 일이었는데, 박사라니 긴장이 안될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전쯤에 완성된 논문과 발표자료를 미리 커미티들에게 공유하고, 수십 번 또 연습을 한 것 같다.  


7월 12일, 당일날 아침에 이런저런 서류와 출력물을 준비한다고 제대로 씻지도 않고 체육복 입고 건물을 돌아다니니 스텝분이 '어허 재 왜저러지?'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나중에 그분이 “그래도 디펜스인데 체육복은 좀 그렇지 않니?” 러고 말해주려고 하셨다 했다). 그러고 오후에 말끔하게 씻고 UNIST 면접 때 입었던 양복도 갈아입고 발표에 나선다. 한 시간이 넘게 발표가 이어졌는데 뒤에는 동기들과 후배들이 나의 발표를 보고 있고, 제일 앞 줄에는 교수님들이 앉아 있었다. 이제는 눈감고도 알 수 있는 슬라이드와 백번은 고쳤을 것 같은 슬라이드와 기억 안 날 만큼 연습했던 발표. 다행히 전반적인 분위기는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학생들과 잠시 밖에 나가 있으라고 지도교수님이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마치 억겁의 세월 같은 시간이 흐르고 (느낌상) 문이 열리며 지도교수님이 나오시면서 들어오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Congratulation Dr. Gang" 하신다.


Congratulation Dr. Gang


무너짐... 크게 몰아쉬었던 큰 한 숨이 터져나오는 것 같다. "휴~~". 그러고 나서 각 교수님들의 코멘트가 쏟아진다. 그리고 빽빽한 두 장이 넘는 종이에 코멘트가 가득하다. "이거 수정하면 되겠다"라고 하신다. 밖으로 나오니 동기들 그리고 후배들의 축하 인사가 쏟아진다. "축하해~.." 동기들 중에서 처음으로 디펜스를 한 것이다.


그렇게 이제 진짜 박사가 되었다. 그날밤 집에 그 소식을 알리고, 아마 얼마만인지 모를 숙면을 취했던 것 같다. 세상이 멈춰진 것처럼.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수정요청은 꽤나 까다로웠는데 마무리까지 지도교수님이 찬찬히 도와주셨고, 다행히 여름 학기 졸업사정 Deadline 마지막 날 그것도 지도교수님이 직접 걸어가서 서류를 제출해 주셨다. 나는 수정본이 완성되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해서, 끝까지 그 웃음과 도움을 잊지 않으셨다.


디펜스 발표

사진에서는 왠지 자신감이 가득차 보이긴 하지만, 긴장감 백배였다.

교수님들끼리 심사를 하시는 동안 수고했다며 응원해주었던 동기와 후배들 (이제는 다들 교수님 들이시네)


그렇게 이제 공식적으로 박사가 되고 한국에서 그렇게 되고 싶었던 교수가 된 것이다. 미국행을 꿈꾼지 15년, 그리고 박사과정을 마음먹은 지 9년 만이었다. 돌아오는 길도 역시 처음 미국 왔던 길과 마찬가지로 Newark 공항에서 갈아타고 입국했는데, 미국에서 떠나기 직전 날 저녁 호텔에서 그간의 소감을 담은 글을 남겼다.



"

학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마지막 밤에.


2009년 6월 6일에 할아버지 국립묘지를 방문하고 돌아오고난 다음날 아침, 나는 10년을 준비하던 미국 유학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즐거움(?), 행복함(?)이 느껴질 줄 알았지만, 실은 비장함이 더 컸던 것 같은 느낌이다. 와이프에게 전화해서 합격소식을 알리고, 결정은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하니, 이미 갈 것을 결심했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과 안정된 생활을 뿌리치고, 새롭고, 힘들게 시작했던 미국생활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웠다. 언어의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생활의 차이, 주택 문화의 차이, 문화의 차이 모든 것이 크게 다가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런 불평 없이 첫날을 했던 그 당시 학생회장 성호를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국 생활 새내기를 도와준 것은 감사한 일이라 생각한다.


새로 들어간 집안에는 한국에 모든 방마다 당연히 있는, 등이 없어 화장실 불을 켜고 몇일간 책을 읽어야 했으며, 준비해 갔던 봉지라면을 끓일만한 냄비가 없어서, 비어있는 옆집에 몰래 들어가 전자레인지를 사용(당시 이사 간 집에는 전자레인지를 수리 중이라 사용할 수 없었음)하여 제대로 익다만 라면을 먹어야 했다.


글쎄,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 산책하는 그 길과 공기가 좋았고, 지평선까지 보일만하게 탁 트인 시야가 좋았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첫 수업의 긴장은 뭐라할것 없이 대단했으며, 수업 때마다 시키는 자기소개는 항상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형편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학습의 동물이고 적응하는 동물이 아니었던가. 서서히 미국생활이 익숙해 가고, 이제는 어느덧 스타벅스에서 떳떳이 "room for cream"을 외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게 6개월 뒤었지만,

첫 수업을 들었던 그 교수님은 나의 지도교수님이 되어 있었고, 10여 년의 기다림의 보상이었던가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던지 그 첫 수업에서 일등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항상 선순환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공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낌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첫해 겨울에 한국에서 모질게 질렀던 첫 번째 내 명의 집을 처분하고, 신혼살림을 눈물을 머금고 정리해야 했던 와이프가 미국으로 왔고, 첫날 집에 와서 샤워하다 뜨거운 물이 끊기는 바람에 그동안 쌓였던 아쉬움과 회한이 터져버려 울고 앉았던 와이프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며 또다시 마음잡은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첫해를 마치는 봄학기, 나의 논문이 90세가 넘는 노교수의 도움으로 출판이 되었으며, 그 논문은 일 년 차 처음으로 학교에서 실시하는 박사과정 학생 세미나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무슨 깡이었는지, 동기들은 "전설"이라며 나를 추켜세웠으나, 교수들의 나름 멍했던 얼굴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2년 차가 되면서, 사랑하는 불똥이(아라)가 들어서,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래도 효녀라 입덧은 여름방학 때, 출산은 마지막 수업과 시험을 마친후에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타이밍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미국 경영학회가 매년 1월 초에 논문 마감일이 있어서, 아라가 태어나자마자 벌건 눈으로 한 손엔 아라 한손엔 논문을 들며, 전전긍긍하던 시기를 잊을 수가 없다. 정말 몸이 피곤하고, 짜증도 났지만, 아라의 손짓 발짓에 서로 행복해하며, 좌충우돌하는 초보 부모였지.


그래도 하늘이 도왔던지 2년 차 때 홀로 냈던 논문이 채택되어 Texas, San Antonio에서 불볕더위를 직접 실감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아라가 태어나고부터, 절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집에서 홀로 아이를 보고 있는 와이프도 힘들어했고, 일은 쌓여만 가고 절대적 시간이 없는 나도 초조함이 더해져 가면서, 2년 차가 마칠 때 즈음 떨어져 가는 통장잔고에 나는 벼랑 끝에 서있지 않았나 싶다.


아마 그때 즈음부터였을까, 지금 논문을 마치는 시점까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학교에서 공부시간 동안 화장실을 가지도, 점심을 먹지도 않게 되었다. 시간 때문에.. 아마 다 합하면 열 손가락을 못 채울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 동기들과의 파티는 참가해본 적도 없다. 이때 내 일과는 10시에 학교 가서 4시에 퇴근하고, 4-9시까지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새벽 2시에 돌아가는 루틴이 반복되었다. 글을 읽고 쓰는 언어적인 문제가 아무래도 Native 보다는 절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는 잔고와, 힘들어하는 주변 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찍 나갔던 Job market은 사실 절망의 연속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그럴 만도 하지만, 항상 초조해하는 지켜봐 주며 힘을 주던 와이프가 생각난다. "걱정하지 마, 오빠 잘될 거야". 이 말이 나를 더 초조하게 했지만 사실, 그 말 밖에 할 수 없었던 와이프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총 60개가 넘는 원서를 보내어, 10 여 곳에서 전화 인터뷰를 받았으며, 4 곳에서 캠퍼스 비짓(현장 인터뷰)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으나, 임용과정은 정말 피를 말리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 취업 과정에서 항상 힘든 과정을 보내었지만, 주변 상황상 벼랑 끝에 몰린 나로서 그 체감 효과는 훨씬 컸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좋은 곳에서 오퍼를 받아, 지금 학위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마무리하며, 현재 한국으로 돌아가는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정리하고 있다.


누군가 여기(미국)에서의 생활이 어땠냐고 물어보더라.
미국 생활 새내기에서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이렇게 잘 살아남았고, 보스턴, 샌안토니오(텍사스), 맨해튼(뉴욕), 뉴저지 한인타운, 올랜도 (플로리다), 샌디에이고, LA, San francisco (캘리포니아) 등 많은 곳에서 다양한 것을 가족과 함께 느끼고 배웠다.


언어적 장벽이 쉬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주변의 자연환경과 남들을 그리 의식하지 않고, 가족을 위하는 문화는 배울만 했으며, 아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 정말 부러웠다. 물론 의료시스템 등 힘든 점도 있었지만,.


모든 것들을 물어가며 배우고, 몸으로 겪었기 때문일까.
초보 부모에서 중급 부모로 업그레이드 때문일까.
이제는 티브이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영어들이 많은 부분 들어오기 때문일까.
많지는 않았지만, 좋은 사람들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맥주 한 병과 바비큐 고기 한 점의 즐거움 때문일까.
가끔 여름밤 잘 모르는 오케스트라였지만, 정말 감동을 주었던 오케스트라 연주를 잔디밭에서 널브러져, 피자와 맥주와 함께 즐겼것 때문일까.


이곳이 참 정이 들었다.
아라의 고향이기도 하고, 나와 지영이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던 곳이기 때문이겠지.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는 입장에서 처음으로 섭섭한 기분이 많이 드는 것을 보면,
이곳에서 지독했던 4년의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일 거라 생각한다.


미국 적응을 위해 많은 도움을 줬던 많은 주변 후배들, 선배들,
영어 못하는 제자를 만나, 몇 시간을 같이 앉아서 일일이 고쳐주던 지도교수 Dr. Simons
멀리서 애태우며, 지켜봐 주시던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
모두 고맙고, 짧은 글로 표현하기는 참으로 힘든 경험이었지만,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기 전에 짧게나마 정리해 본다.

그리고, 내가 처음 왔을 때부터 나를 도와줬던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 있는 Tracy.
나 혼자 있을 때도 가족처럼 추수감사절 때 초대해줬으며, 와이프가 처음 왔을 때도, 아라가 태어났을 때도 기뻐해 주던 친구인데, 몇 달 전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해 버렸다.
내가 이렇게 잘 마무리한 것을 알면 기뻐했을 텐데,..
이 녀석 하늘에서 잘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2013년 7월 17일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새벽에,


Newark 공항 한구석 호텔방에서.


" (Facebook 에서)      


출처: https://07701.tistory.com/133 [강박의 2 c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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