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빈자리를 살짝 겪은 40대 가장의 깨달음
약 26~27년 전 도덕 교과서에 있던 내용이었을 겁니다.
‘가정 주부의 삶은 당시 월급 약 91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 그러니 주부라고 무시 말고, 그 삶을 존경해야 한다 ‘는 내용이었더랬죠.
제가 나온 학교는 남자들만 다니는 중학교였고, 당시 저 내용을 배웠을 때는 반의 상당수가 공감을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주부의 어려움을 인정은 했지만, 과연 91만 원의 가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었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불혹이 넘은 지금, 갑자기 와이프가 교회에서 하는 봉사활동을 무려 3박 4일간 간다고 합니다.
금, 토, 일, 월! 이게 웬 꿀입니까 ㅎㅎ 거기에 사람 좋은 우리 팀장님. 금요일 반차를 쿨하게 승인해 주십니다.
(팀장님 사랑합니다)
애들도 시험 끝나면 치팅데이가 있는데,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완벽한 휴가라 마음이 무척 들떴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마누라님께서 본인도 뭔가 급했나 봅니다.
‘선녀와 나무꾼’에 나온 선녀처럼 아이들을 다 데리고 봉사를 갔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중간고사 시험을 앞둔 중3 딸과, 이제 막 핸드폰을 사준(사준 지 얼마 안 되어서 해킹에 성공한) 중1 아들은 저에게 맡기고 가셨습니다..
(ooops...... 뭔가 튄 거 같은 느낌이...)
근데, 거기에 한술 더 떠서, 4일간 생활지침도 시원하게 딱 남기고 가셨네요..
그 생활지침은 이렇습니다. [외식은 지양하고, 냉장고에 있는 것들부터 최대한 파 먹을 것]
지역화폐카드를 두고 갔습니다만, 다년간의 경험상 이건 편하게 쓰라는 시그널이 아닙니다.
어떻게 쓰는지 보겠다는 거죠 ㅎㅎㅎ
거기에, 반차 쓰고 들어간 오후부터 아들놈이 깜짝 놀랍니다. 왜 이리 빨리 오셨냐고...
”너 해킹해서 핸드폰 푼 거 체크하려고 빨리 왔다 이놈아 “
그때부터 아들은 눈치모드로 바뀝니다.
그때부터 제 휴가는 사춘기 아들놈 케어 + 중간고사 앞둔 딸아이 공부 보조+멘털케어로 바뀝니다.
(김동률이 부른 ‘그때가 좋았어 ‘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야밤에 중3 딸이 ‘헬프’를 요청합니다. (네가 디아블로 2의 데커드 케인이냐... 네가 보는 시험에 help라니..)
아빠한테 쓱 들이대는 문항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낑낑거리며 풀어줬는데, 아빠하고 풀 때는 이해가 가는데, 결국 내 손으로 푼 게 아니라서 나중에 시험 때 맞출 자신이 없다고 하네요..
(틀려도 뭐라 안 할 건데.. 약간 미리 방어하려는 준비인가..)
그래도.. 최선을 다해, 43세 부장님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다 써 가며 토요일 12시 30분까지 문제를 같이 풀었습니다.
끝나고 뭐 좀 제 시간을 가지려 하는데.. 전두엽이 안 돌아갑니다 ㅎㅎ 체력을 다 썼다고 자라고 하네요..
한참 자고 일어나니, ‘아이들 밥 줘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모님의 지침서는 부엌 아일랜드 상판에 딱 붙어 있습니다. (거기서 사모님이 계속 저를 감시하고 있는 거 같네요)
할 수 없이 사모님의 지침서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배*, 요*요 등등의 앱을 애써 부인하며.. 최대한 집에 있는 재료로 아이들 밥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사진의 콩나물국밥은 집 앞에서 사 올까 진지하게 고민했다가.. 지침서를 다시 보고... 지역화폐 되는 마트서 콩나물 990원 치 사서 육수 냈습니다ㅠ)
‘오늘은 아이들에게 뭘 먹일까..’, ‘와이프가 돌아왔는데 빨래나 설거지 안되어 있으면 또 힘들 텐데..’
이런 생각에, 할 일들 하나씩 쳐내고 나니 어느덧 일요일 10시 45분입니다. ㅎ
(정말 오락실에 있는 두더지 게임처럼 해야 할게 계속 튀어나오네요. 빨래, 설거지, 분리수거, 청소, 밥 짓기, 다시 설거지.. 청소..)
이렇게 나의 황금 같은 휴가는 장렬히 산화하였습니다.
91만 원은 무슨.. 이거 910만 원은 줘야 할 거 같습니다. 놀고 싶은데 놀지 못하고, 쉬고 싶은데 쉬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니까요..
와이프가 회사를 그만뒀을 때 사실 상당히 부러웠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먼저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는데, 막상 3일간 집에서 와이프 역할을 해 보니, 회사가 그.. 그리워지더라고요.
이래서 겪어보지 않고 말을 쉽게 하는 게 참 조심스럽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요리하는 걸 상당히 좋아합니다만, 이게 ‘업’이 되니까, 요령도 부리고 싶고, 아이들 입맛 맞추는 게 상당히 쉽지 않네요. 그걸 다 케어하며 밥하고 아이들 먹이는 와이프를 다시 보게 됩니다.
앞으로는 집이건, 회사건 함부로 판단하기 전에 상황을 좀 들어보거나, 화내기 전에 상황을 물어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게.. 성숙한 사람이 지향해야 할 행동이고,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 삶에서 체화되는 부분이어야 함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내일 드디어 와이프님이 컴백하는데, 제 노고를 좀 알아주겠죠? ㅎㅎ
P.S 사실 뭐.. 와이프가 제가 한 거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이 기간이 저에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과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작년에 실패한 콩나물국밥 육수를 이번에는 성공했으며, 각종 설득과 동기부여 기술을 사용해 아들이 스스로 방을 치우게 만들었고, 약간의 일탈로 다른 카드를 써서 아이들의 간식을 사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빴던 30대가 지나고 ‘난 저 아이들이 어떤 아빠로 기억할까?’라는 질문을 40대에 하게 되었는데, 이번 주말은 스스로에게 살짝 떳떳한 기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