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한 그릇으로 소환한 30년 전 추억들
저는 IMF라고 불린 어려웠던 시절에, 경남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당시 제가 신세를 크게 진 친구의 부모님께서, 저와 친구에게 두어 번 정도 냉면을 사 주셨습니다.
그때 기억으로, 꽤 멀리까지 차를 타고 음식점으로 갔었고, 가정집인데 많은 사람들이 냉면을 드시고 계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지역은 진주 옆의 사천이고요. 한국 3대 냉면 중 하나인 진주냉면의 원조가 이 사천냉면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차마 친구 어머니께 말씀은 드리지 못했지만, 인생에서 처음 접한 이 냉면은 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육수가.. 처음 접한 맛인데 상당히 오묘하다? 뭐가 이리 섞인 맛일까?'
'왜 귀한 육전을 왜 육수에 담가 먹어야 하나?'
(진주냉면은 육전이 고명으로 올라갑니다)
이런 생각들인 거죠. 마치 평양냉면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처음 받은 문화충격과 비슷했었습니다.
30여 년이 흘러, 이번 추석에 처갓집으로 가는 길에 요깃거리를 이야기하다가 냉면 이야기가 나옵니다.
검색을 해 보니, 30년 전에 먹은 그 자리 언저리쯤에 냉면집이 아직 있습니다. 사진을 보니 추억 속에 있는 그 냉면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대전 국밥집 픽에서 자신감을 얻었기에, 이번에도 아이들에게 과거 추억을 이야기하며 호기롭게 도전해 보자고 합니다. 아이들이 좋다고 합니다. (이전 글을 보시면 대전 국밥 이야기가 있습니다)
https://brunch.co.kr/@hyod9866/54
약 30분 후 냉면집에 도착합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주문을 합니다.
고등학교 때 먹었던 그 똑같은 모습입니다.
숟가락을 들어 육수를 맛봅니다. 그 오묘했던 맛이 똑같습니다.
물론 이후 30년 동안 수많은 냉면을 먹었기에, 그게 이상한 맛이 아닌 사천냉면의 육수라는 아이덴티티로 다가옵니다.
함흥냉면보다 좀 많이 두꺼운, 그러나 적당히 쫀쫀한 면발도 그대로입니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 오릅니다. 신이 나서 냉면 한 젓갈 뜨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근처 공항에서 군 복무를 한 일, 진주에서 살기 좋은 동네는 어디라는 둥..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맛은 분명 있는데, 이 아이들은 제가 가진 추억이 없습니다.
그 차이가, 똑같은 음식을 먹는데 감동의 차이로 돌아옵니다.
살짝 아쉽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아빠랑 냉면을 먹은 것이 새로운 추억이 되고,
저에게는 30년 전 추억을 자녀와 함께 업데이트한 감사의 시간으로 기억해야 할거 같습니다.
PS1. 과거에 사로 잡혀 있고, 그때가 좋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사는데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과거의 추억을 통해 현재 감사할만한 추억을 만드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PS2. 당시 아버지 사업이 어려웠는데, 몇 명의 친구들과 그 부모님들께서 저를 상당히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사실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학업을 지속하는 게 어려웠을 상황이었고요.
우울한 시절을 무사히 넘기게 해 주신 이분들께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