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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Aug 29. 2020

'다수'의 반대가 '혼자'는 아니잖아?

혼자일 수 없는 나


 지난해 10월 친구와 부산영화제를 갔다. 영화제는 개봉하지 않은 영화를 미리 볼 수 있는 기회 혹은 개봉까지 닿지 못할 영화를 볼 수 있는 축제다. 게다가 단편영화를 영화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에 영화제에선 꼭 단편섹션도 챙겨보는 편이다. 그때도 단편을 잔뜩 예매하고 두 개의 장편 영화를 챙겨봤다. <남매의 여름밤>과 <바람의 언덕>이었다. <남매의 여름밤>은 보는 내내 따뜻하고 아팠다. 개봉하면 한 번 더 볼 마음까지 생겼다. 역시나 지난 20일 개봉한 이 영화에 대한 평론가의 평은 호평일색이다. 지난 4월에 개봉한 영화 <바람의 언덕>의 평도 꽤 괜찮았다. 관객도 대다수가 별을 꽉 채웠다. 내겐 없는 별이었다.


 의아했다. <바람의 언덕>을 보면서 몇 번이고 피식댔다. 과장된 연기와 어설픈 연출 그리고 익숙한 신파가 가득했다. 영화제에 올라온 것을 신기해하며 상영관을 나왔다. 그런데 그 영화는 다른 영화제에서도 승승장구하며 상업적 개봉까지 이뤄냈고 긍정적인 평을 끌어냈다. 이 정도까지 이르니 나 자신에게 의아해졌다. 꼭 이 영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영화나 책과 안 맞을 때가 많다. 취향 차이를 떠나서 내겐 그 콘텐츠들이 못 만든 류로 보일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콜미바이유얼네임>도 ‘나이차 많은 백인 남성 간 동성애 판타지물’로밖에 안 보였다. 그 영화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해낸 사람들에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퀴어물 서사에 유독 너그러운 관객들의 시선에 괜한 반감만 생겼다.


 이런 일들을 반복해서 겪다보면 가끔 울적해진다. 그룹에서 사람들과 섞이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 튀는 언행을 굳이 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내겐 자연스러운 것들이 때론 이물질이나 불순물로 붕붕 떠다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면 끼어들고 싶은 마음보다 한걸음 물러나는 게 익숙해졌다. 1년 중 11개월은 그 감성을 고유한 것으로, 독특한 개성쯤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작 내가 만든 작품이 영화제에서 줄줄이 떨어질 땐 내가 가진 시선과 소통 방식이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게 아닐까란 자기폭력에 빠진다. 일 년 중 어느 한 달은 보편과 평범을 찾아 나서며 자기연민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린다. 남들이 웃지 않을 때 웃었고 웃는 포인트에선 화가 날 때도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아직도 뭔지 모르겠다.


 생활 곳곳에서 튕겨져 나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사소하지만 에어팟 케이스를 고를 때도 그랬다. 지인과 함께 에어팟 케이스를 같은 사이트에서 하나씩 골랐다.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 묶어 주문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때 지인이 고른 건 내 기준으론 최악이었다. 하지만 인기순 정렬 시 그 케이스는 1위였고 내가 고른 건 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약 30개 중 28번째였다. 이런 작은 일들이 쌓여 자기 객관화를 힘들게 만든다. 뚝심있게 밀고 나가다가도 일주일의 하루, 분기마다 일주일씩은 휘청댄다.  SNS에 사진을 올릴 때도 친구들에게 검토를 받았다. SNS는 나보다는 남들을 위한 공간이니까 그 '감성'에 이왕이면 맞추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선호하는 류는 대개 그 '감성'에  크게 벗어나 있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항상 조심한다. 어쩔 땐 과할 정도로 배려하는 태도가 소위 ‘소심한 남성’의 특성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차라리 그게 낫다. 마음 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다보면 꼭 상처를 줬다. 직설과 비판은 억누르지 않으면 자꾸 새어나갔다. 그러면서도 남들의 의도치 않은 언행에는 상처받는 모순적인 사람이 돼갔다. 집단에서 겉도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가까워질수록 경계심이 늘어갔다. 경계심을 허물 정도로 가까워졌으나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람들이 꽤 있다. 견고한 경계심은 그 만남과 상실의 경험치가 쌓여 만든 방어기제다.


 소속감 또한 경계 대상이다. 내게 소속감은 잠깐의 안정을 줄진 몰라도 곧 닥칠 상실을 가리키는 위험 신호나 마찬가지다. 사람(혹은 사물)을 확신에 차서 좋아한 적도 없다. 호감을 가져도 그 유효기간과 가용 폭은 금세 끝나버렸다. 경계심은 일종의 '예의바른 무관심'이었지만 선 긋는 행위, 즉 거리두기로 비칠 때가 많다. 나는 그저 그 선을 넘지 않고 선 위를 달릴 따름이다. 넘어 오지도, 넘어 가지도 않으려고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대한다.



 항상 선 위에서 고꾸라지지 않는 건 아니다. 가끔은 안으로 침범 당하고 종종 밖을 침략한다. <바람의 언덕>을 같이 본 친구와도 싸웠었다. 그리고 그 영화의 행보에 놀라움을 표하며 조금씩 화해해갔다. 연락할 구실이 있던 것이다.  싸워서 일그러지는 건 한 순간이지만 화해 후 가까워지는 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바람의 언덕>이 없었다면 그 친구와 만나면 인사하는, 아마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잠시 눈을 크게 뜨며 반가움 정도만 표했을 것이다. 일부러 만날 약속은 잡지 않는 사이가 됐을 테다. 영화를 보며 웃음이 새어나올 때마다 옆에서도 웃음 소리가 들렸던 덕분이었다. 에어팟 케이스 두 개를 두고 인스타그램에 설문을 올렸을 땐 선호 차가 비등했다.




 대중, 보편, 평범 등의 말과 내가 안 어울릴진 모르겠다.


 그럼에도 혼자는 아니다.


 나와 어울리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음을 잊지 말고 오늘을 버텨낸다.


 선을 굵고 선명하게 긋다가 통로 몇 군데를 마련해둔다.


 어쩌면 그 깜깜한 통로에서 또 다른 만남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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