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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Feb 09. 2021

재즈처럼 사는 삶은 어떠한가, 영화 <소울>

포착과 기록, 그리고 재즈

영화평보다는 영화를 매개 삼아 삶에 관한 글을 적어봅니다.


 왜, 어떻게 살 것인가란 질문은 세대를 거듭해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대답은 개인마다 그리고 시대적 감수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 꼭대기를 차지하는 ‘자아실현의 욕구’처럼 인간은 삶의 목적을 성취에 두고 있다는 것은 꽤 오랫동안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왔다. 




'디즈니/픽사'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쭉 이어져온 소위 '목적론적 사고'를 우습게 만들었다. 애초에 욕구가 피라미드로 가시화돼있는 것처럼 어떤 욕구에 우위를 두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그리고 위의 단계로 올라가는 것을 ‘목적’삼아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을 인간의 숙명처럼 내재화했다. 영화 <소울>은 이와 같은 목적 지향적 삶의 태도에 반기를 든다. 목적론을 아주 귀엽게 만들어버린다. 


 귀엽게 그려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전복이었다. 업적을 남긴 이들이 ‘삶의 목적’을 운운하며 ‘22’라 불리는 영혼을 다그치는 모습마저 귀여워 웃음이 난다. 누군가를 귀여워한다는 사고 안에 위계가 전제돼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충분히 전복이라 할 수 있다. 이성과 목적을 찾아 합리의 영역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철학의 한 줄기가 대중 문화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이다. 짜릿하다. 온갖 각주나 미주를 차지하고 있는 학자들보다 ‘22’가 발견하고 ‘조’가 깨닫는 삶의 가치를 긍정한 것이다. 


악 귀여워


  여전히 남는 ‘삶의 이유’에 관한 질문에 ‘22’와 ‘조’가 답한다. 바로 22가 사용한 ‘재즈한다(jazz-ing)’라는 말을 통해서 말이다. 성취를 향해 돌진하는 사자, 성취를 위해 감내하는 낙타 등으로 은유되는 전방위적 공격성과 무한 책임이 아이보다도 더 이전의 존재인, 사전 세계에서 날아온 ‘22’에 의해 해방되는 셈이다. 말은 상상을 가두기도 하지만 없던 말의 탄생은 상상의 기폭으로도 사용된다. 조는 22가 처음 이 말을 사용하자 없는 말이라고 비웃지만 후엔 그도 jazzing이란 어휘를 사용한다. '재즈한다'란 말을 통해 조, 그리고 우리는 재즈와 같은 삶을 상상하게 된다. ‘22’가 찾아내는 불꽃, 그리고 불꽃의 의미를 알게 된 조 또한 마침내 해방에 이르며 영화는 끝난다. ‘재즈한다’라는 말은 <소울>의 전부다.


‘재즈한다’를 그 순간을 즐기라는 의미로만 본다면 조금 아쉽다. ‘재즈한다’는 그 순간을 ‘포착’하라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포착만으로도 부족하다. 오늘 점심 메뉴에 대한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할 것이라 짐작한다. 그렇다면 가장 최근에 먹었던 맛있는 음식은? 아니면 오늘 가장 인상 깊었던 대화나 만남은? 쉽사리 말할 수 없다. ‘포착’과 ‘기록’이 한 몸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22’가 자신에게 ‘불꽃(spark)’를 준 요소들, 베이글이나 씨앗 등을 챙기지 않았다면 그의 포착이 얽혀 불꽃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피라미드식 사고가 무너지면 우리의 삶은 더 단단해진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계획이 미슐랭 가이드에 등록되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겠단 목표보다 열등하지 않다. 계획이나 목표가 없어도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포착하고 기록해가는 삶만 있다면 자아실현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아도 불행할 일이 없다. 소중한 하루가 있다면 더 값진 내일을 꿈꾸는 자세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부록

1) 포착과 기록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다큐멘터리스트다. 일상의 면모를 포착하여 이를 기록하며 알록달록하게 단장시킨다. 쉽게 지나치는 삶의 단면을 해석하여 재현한다. 다큐멘터리스트를 개인과 사회의 번역가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스트는 모두의 삶이 가치있다 말해주는 사람들이라 할 수도 있겠다.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을 내는 날도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2) 흑인 문화에서 시작한 ‘재즈’를 주류문화에서 끌어올린 것은 전유인가, 연대인가. 백인이 재즈를 배워가는 과정이었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전유라 할 수 있겠다만..이 영화를 그렇게 단언하긴 힘들 것 같다.


3) 알랭드보통은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노동 현장의 각 순간에 주목하다보면 숭고함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한다. ‘숭고’까지 갈 필요도 없다. 포착하고 즐기면된다. 재즈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를 기억하고 곱씹는 것까지 하면 화룡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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