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나의 자서전>을 읽고
경계에 관한 씁쓸한 실감 속에서 가까스로 발견하는 낙관 : <불과 나의 자서전>(김혜진, 2021) 을 읽고
경계는 일단 그어지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말끔하게 지워지곤 한다. 그와 동시에 인위적/작위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그 경계가 지극히 유동적이라는 가능성도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그 경계가 유지돼야 이익을 더 보는 사람들은 종종 경계 밖 사람들을 더 누르고 자신들을 치켜세우기도 한다. <불과 나의 자서전>은 바로 그 경계에 관한 지난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독자와 작가 자신에게도 홍이의 알레르기가 조금이라도 퍼지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적어도 나에겐 그 알레르기가 옮았다. 이런 전염병이라면 적극 환영이다.
모든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은 경계는 더 교묘히 상대를 배제한다. 책을 읽던 중 우연히 한 아파트에 방문하게 됐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가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며 아파트 단지 내 지도를 보여줬다. 단지 내에는 101동부터 113동까지의 건물이 표시돼있었다. 뭐가 흥미로운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친구는 정문 밖 건물을 가리켰다. 손 끝이 닿은 건물엔 114동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써있었다. 해당 아파트는 ‘소셜믹스’라 불리는 제도가 운영 중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 공공임대주택을 포함시키는 제도다. 이름부터 웃겼다. 애초에 ‘다르다’는 전제를 깔았기에 ‘믹스’란 말이 나온 것일 테다. (우린 같은 것끼리는 ‘섞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 전제된 다름이 114동의 위치, 그리고 지도에 삭제된 114동으로 가시화돼있던 것이다. 114동은 공공임대주택동이었다.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래미안 아파트엔 이렇게 포함과 배제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른 소셜믹스 아파트도 상황이 비슷해보인다. 어떤 아파트는 몇 층까지는 공공임대주택이고 그 위로는 아니다보니 계단을 막아뒀다고 한다. ‘남일동’과 ‘중앙동’이 일상 곳곳에 스며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불과 나의 자서전>에서 남일동과 중앙동에 그어진 선은 행정구역의 구획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단순히 내집단/외집단이 아닌 위계를 나타냈다. 행정구역 재편으로 중앙동에 편입된 후에는 마치 남일동에 살았던 적이 없던 것처럼 행동하는 홍이의 부모는 사실 그 전부터 다른 남일동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지어 왔다. “넌 엄마가 아침 챙겨주잖니”(17쪽) “네가 가겟집 애도 아니고, 보살피는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닌데”(22쪽) 등의 발언에서 그 타자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아와 홍이의 어릴적 상황에 과몰입되어 독서를 몇 번 멈추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두번은 아니었단 것만큼은 확실하다. ‘홍이’는 남일동 거주 시절, 그러니까 중앙동 친구들로부터 ‘남토’라고 불릴 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이었을 것이다. 마치 경계 위에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지 않았을까. 성장의 발걸음이라는 확신에 찬 기대에 부푼 마음을 안고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원래 살던 지역이 아닌 다른 곳으로 고등학교를 간다는 설렘과 긴장은 한 달이 채 가질 않았다. 나름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있었지만 주로 수도권 위주였다. 하지만 출신 지역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돈 많은 애, 그리고 나머지였다. 고1 때 나눈 대화 중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게 있다. 장난 삼아 서로의 집이 전세냐, 자가냐 등을 묻다가 누가 전세라고 하니까 “에이 실망.”이라는 말을 하하호호 주고 받았다. 그러자 전세 살았다 답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빠 한국은행 다니거든!” 그 와중에 나는 자가라 천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주말에 공공 도서관을 다녔던 나는 점심, 저녁 통틀어 1만원을 받았다. 난 2500원짜리 빵으로 두 끼를 때운 후 남은 돈을 모아 평일에 친구들과 어울렸다. 한번은 축구를 하고 냉면을 먹으러 가던 중 나는 약속이 있다 말하며 빠져나오려 했다. 그런데 나의 어설픈 거짓말을 믿지 않던 친구가 공부하러 가냐며 계속 붙잡았다. 나는 돈이 없다고 솔직히 말했고, “내가 사줄게.”란 대답을 들었다. 수치심을 배웠다. 한편, 중학교 친구들에게 나는 다른 지역으로 고등학교를 다니고 공부 잘하는 친구였다. 가족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나는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는 날을 보내며 어떤 병을 쌓아갔다. 그 병을 동력 삼아 공부에 그렇게 목매단 것 같다. 성적은 나에게 ‘중앙동 티켓’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나는 소설 속 홍이와 달리 부모님에게 화살을 돌렸다.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소설 속 상황을 빗대서 말하자면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를 왜 중앙동으로 보냈어? 안 보냈으면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난 부모님에게 쐐기를 박았다. ‘왜 엄마, 아빠는 중앙동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왜 내가 중앙동 사람이길 바라는 거야?’ 우리 부모님에게 홍이 부모님의 모습이 얼핏 보이기도 했다. 이사 후 현재까지도 부모님은 그 동네 이웃과 소통하며 지낸다. 그런데 종종 그 동네에 이제야 파리바게뜨가 들어왔다며, 볼링장도 없다며 명확히 선을 긋는다. 껄껄대는 웃음과 함께 경계는 공고해진다. 그럴 때면 알레르기 반응을 막을 수가 없다. ‘남일동’을 ‘남일도’로 만드는 시선, 수아를 ‘남민’이라 놀리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폭력 등이 담긴 웃음이 내 몸을 마구 할퀸다. 물론 나도 홍이처럼 “내 부모를 비롯한 중앙동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공유하는 그런 마음”(111쪽)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점점 바쁘다는 핑계로, 원래 그랬다는 닳고 닳은 변명으로 그 마음을 모른척하게 될 것 같았다. 조금 이른 시기에 독립/자립을 한 이유다. 아직은 “감정이라 할 만한 것들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11쪽)고 그저 “실감”(12쪽)만 하는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다큐멘터리스트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어쩌면 주해가 해왔던 일련의 시도들과 비슷한 것들을 하려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가로등을 밝히고, 버스 노선을 들여오는 행동은 자신과 수아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남일동 전체에 이로운 결과를 가져다 준다. 비단 밝은 거리, 버스 정류장 등을 말하는 게 아니다. 후에 재개발 관련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번엔 다를 것’만 같은 분위기가 바로 주해가 만들어낸 것 같다. 수아를 중앙동에 입학시키는 것 또한 변화에 대한 의지, 안주하지 않으려는 절박함 등이 묻어있는 것으로 보였다. 주해의 말이 계속 맴돈다. “절대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114쪽) 이 말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후에 재개발에 처절하게 매달리는 주해의 상황이 더욱 안쓰러웠다. 이 감정은 타인에 대한 동정심보다 공감을 바탕으로 한 자기연민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간직하는 낙관, 혹은 퍼뜨리려는 변화 의지 등은 가해인 걸까.
하지만 그 낙관은 변화를 추동시키는 거의 유일한 가능성이다. 낙관은 간혹 ‘마녀’라고도 불렸던 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새긴 흔적이다. 영웅이나 신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내는 불완전하지만 역사적인 기록이다. 우리가 원하는 천사는 바로 오류가 있을지언정 계속해서 꾸역꾸역 무언가 해나가는 사람들 아닐까. 그게 결국 “다른 사람들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필요해서 하는 일”(95쪽)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언제나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흔적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연중에 남아서 다른 나약한 천사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 나약함이 모여 “상상하지 못했던 것”(44쪽)을 조금씩 해낼 거라 비틀거리며 믿는다. 그 낙관이 없다면 살 수 없다. 그 위태로운 낙관으로 펜을 잡고 카메라를 든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불리는 사람들은 세상 물정을 바꾸고 싶은 이들일 수 있다.
세상 물정에 숙달될까 봐, 익숙해질까 봐, 무서운 요즘이다. 최근 국회 관련된 일을 하며 정치 권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그 안의 달콤함이 어찌나 탐스러워 보이는지, 당뇨가 걸릴지언정 그쪽만을 바라보며 살고 싶단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 안의 쌉싸름한 것들, 그러니까 진절머리나는 차별과 배제가 더 눈에 띈다. 다행이다. 아직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았음에 감사하다. 뒤엉킨 경계가 만들어낸 질서를 계속해서 당연시 여기지 않으려면 무구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도 노력을 말하는 게 조금 서글프지만 말이다. 그만큼 사회는 ‘정상성과 다수’라는 보편이 구획한 경계로 움직인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이를 어색하게 여기는 태도의 번거로움보다 그 보편의 경계에 무뎌진 내 모습이 더 섬뜩하다.
경계가 사라진 후 생기는 무질서나 혼돈이 늘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서 생겨난 재배치는 이전의 경계가 있을 때보다 불행의 총합을 줄이지 않을까. 사라지지 않으면 생겨나기 어렵다. 무너지는 남일동을 보며 홍이 느낀 건 “안타까움과 미안함, 후회와 죄책감 따위의 감정”(11쪽)이 아니라 “실감”이었다. 정확히는 “실감”과 “의심”(12쪽)이었다. “지금껏 단 한번도 마주한 적 없는” 무너진 “남일동의 풍경”(15쪽)은 실감이 나면서도 의심스럽다. 그 의심이 드는 건 “상상하지 못했던 것”(44쪽)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주침 덕분에 우린 전례 없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비록 의심스러운 믿음일지라도 말이다. “자욱하게 먼지가 피어오르고 솟구치는 먼지 구름 너머”(15쪽)에 펼쳐질 새로운 세상 물정에 대한 낙관을 품어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혀가 굳으려 할 때마다 침을 삼킨다. 더 강한 전염력을 지닌 두드러기를 기대하며 손등을 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