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사귀가 없으면 꽃이 필 수 없잖아?
여기 조금 특별한 암탉 한 마리가 있다. 날갯짓 한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양계장의 좁은 우리에 갇혀 있으면서 늘 마당을 꿈꾼다. 밖에서 불어오는 꽃잎조차도 암탉에게는 그곳에서 나와 저를 찾아오라고 부추기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불가능을 말할 때 목숨을 건 사투 끝에 암탉은 좁은 철창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지만, 멋진 이름도 생겼겠다 이제는 넓은 마당에서 남은 인생을 즐겨보나 싶었는데 마당 식구들은 암탉을 조금도 반기지 않는 눈치다. 양계장에서 벗어나 처음 마당을 밟아본 암탉의 삶은 그렇게 시작부터 험난했다. 그러나 양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미지의 세계 숲으로, 그리고 늪을 향하여 암탉은 계속해서 낯선 환경에서의 모험을 선택한다. 이는 마당 식구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자신을 위한 선택이자 아주 작고 가냘픈 한 생명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동시에 난종용 암탉에 불과했던 잎싹에게 엄마라는 새로운 역할이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제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웠던 잎싹이 새끼 오리의 보호자를 자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아이가 생기고 나면 혹은 태어날 때부터 여성의 내면에는 이미 모성애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랬고 내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모성애를 자세하게 배운 기억도 없었지만, 은연중에 세상이 규정하는 모성애의 숭고하고, 경이롭고, 희생적인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정의하고 단정 지었던 것 같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게도 한번 신뢰한 사실을 재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내가 믿고 있었던 사실이 오류 투성이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지난날을 처음부터 돌이켜봐야 하기 때문이고 이것은 모래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막막하고 귀찮은 일이다. 한 가지 다행인 구석이 있다면 사람은 배움을 통해 이해의 영역을 넓혀가고 이 과정 속에서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를-한번 정도는-한다는 것이다.
모성애가 본능이 아니고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 덕목도 아니라면 작품 속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았던 잎싹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모성애를 미화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감상함으로써 잎싹의 선택을 모성애의 측면에서만 바라 보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계장에 갇혀 있던 시절부터 줄곧 잎싹에게는 자신의 알을 품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런 잎싹의 앞에 둥지에 홀러 덩그러니 놓여있는 알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잎싹은 망설이지 않고 선택한다. 난종용 암탉의 삶에서 벗어나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얻었지만, 초록의 보호자를 자처한 이후 자식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구르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모습, 자신의 인생을 뒷전으로 미루는 모습은 모두 잎싹이 선택한 인생이자 결과물이다. 곧 죽을 것처럼 비실비실했던 암탉이 족제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악바리가 되기까지 얼마나 채찍질해야 했을까 내심 연민의 감정이 솟구치면서도 초록이와 함께 있을 때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선택한 인생에 끝까지 책임을 지고 그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은 잎싹이 부러웠다.
작품을 끝까지 감상한 후에 잎싹의 삶에 나를 대입하여 상상했는데 아마도 양계장을 벗어나는 것부터 실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둥오리처럼 날지는 못하지만, 누구보다 높고 빠르게 날 수 있는 파수꾼을 키워낸 잎싹은 그 이름에 걸맞은 잎사귀의 삶을 살았고 인생의 굴곡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용감하고 긍정적인 모습들이 많은 사람에게 공감과 울림을 선물했다.-조금 괴짜 같은 성격도 재미를 더하는 요소였다.-이와 더불어 국내에서 제작되었고 또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는 사실이 본연의 가치를 더욱 빛낸다고 생각한다. 본 작품 이상으로 국내 관객들을 사로잡을 멋진 작품의 탄생을 기대하면서 나도 잎싹처럼 비좁은 철창에서 벗어나 넓은 마당에서의 자유를 꿈꾸며 성장하는 미래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