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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Jun 09. 2020

꼭 구별해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영화 톰보이를 보고

주의 : 이 글에는 영화 톰보이 결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여자 수영복 바지에 살랑살랑 거리는 라인을 가위로 잘라내 버리고 입은 뒤 거울 앞에 서서 자기 몸을 앞뒤로 유심히 살핀다. 뭔가가 부족하고 아쉽다. 느닷없이 동생에게 고무찰흙 놀이를 하자고 하더니 무언가를 쪼물 쪼물 만든다.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와 남자 삼각팬티 모양이 되어버린 수영복 바지를 입고 고무찰흙으로 만든 작은 당근 같은 막대를 팬티 안으로 넣는다. 그리고 다시 거울 앞에서 자기 몸을 앞뒤로 유심히 살핀다. 아이의 표정은 이제 만족스럽다. 다음날 아이는 친구들과 즐겁게 수영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와 빠진 이를 모아 두었던 통에 작은 막대를 담는다. 아이는 그렇게 자기 성정체성을 탐색하고 찾아나간다. 마침 방학이었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왔고 새로운 친구들은 이 아이를 남자라고 믿었다. 그래서 아이는 탐색할 수 있었다. 자신의 성정체성과 성적취향을.

그러나 모래시계 윗통 모래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개학이다. 엄마는 자기 딸이 남자라고 속이고 친구들과 놀면서 여자와 사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간의 따뜻하고 부드럽고 모든 것을 포용하던 자세를 싹 거두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레이스가 달린 옷을 억지로 입혀 데리고 나가 한바탕 주먹질하며 싸운 남자아이 집에 데리고 가서 사과를 하게 했고 사귀는 여자 아이 집에 데리고 가서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에게 괴로워하며 말한다. “너가 남자인척 하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아. 그런데 곧 학교를 가야하잖니. 엄마는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게 엄마가 아는 최선이다.”

 그렇다. 학교. 학교는 남자 아니면 여자여야만 한다. 그 사이에 어디쯤 존재하는, 여자 남자라는 단어로 호칭할 수 없는 어떤 상태여서는 안된다. 내가 무엇인지 탐색해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 아이는 흘러가는 대로 마음 가는대로 놔두며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개학을 앞두고는 남들이 제자리라고 정해준 곳으로 빠른 속도로 끌려서 돌아와야 했다. 동네 아이들은 이 아이가 어떤 성기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겠다며 몰려들었고 사귀었던 여자아이에게는 너가 키스를 여자랑 했는지 남자랑 했는지 확인해봐야 하는거 아니냐고 추궁했고 너무도 마땅하다는 듯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폭력 앞에서 아이는 망연자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 모두에게 폭풍우가 한바탕 몰아친 뒤, 아이에게 매력을 느꼈던 여자 아이에게는 단 한가지 선명한 질문이 남는다.  “그래서 너는 이름이 뭐야?” 모든 꼬리표를 내려 놓고 너의 존재와 만나고 싶다는 선언처럼 느껴져 영어 기초 표현으로 배우는 그 단순한 질문이 그 어느때 보다 묵직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모든 구분과 분류를 내려 놓고 단지 존재를 존재로 만날 수 있는 성숙함을 우리에게 차분히 요청한다. 영화가 끝나고도 나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좋은 영화는 그렇다. 여운을 즐기느라 영화가 끝나면 벌떡 일어나지지가 않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감독 셀린 시아마 2011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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