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방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이에게 글을 올립니다.
아이들이 없는 학교는 조용하다. 더더군다나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수다 소리로 가득하던 아침은 지저귀는 새소리와 놀이터인양 뛰어 노는 고양이들 울음소리만 가득하다. 교사들은 각자 교실로 들어가 온라인으로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종종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내가 학교 안에서 어떤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음을 깨닫곤 한다. 그래서 복도에서 사람 목소리나 웃는 소리가 들려오면 반가와서 괜히 귀를 기울이고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괜히 복도로 나가 바라보기도 한다. 홀로 교실에 앉아 온라인으로만 아이들을 만난지 훌쩍 두달. 적응할때도 되었는데 지난주 화요일 온라인 개학이 일주일 다시 연장되면서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무너지던날 나는 혼자 교실에서 울었다. 언제까지 이 넓디 넓은 교실에서 하루종일 홀로 앉아있어야 하나. 외롭고 허전했나보다.
그리고 6월 4일. 교사 카톡방과 업무 메신저가 수런수런했다. 가방을 바꿔가며 긴 시간을 갖혀 있었다는 9살 아이가 결국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아이가 의식이 없던 그날 아침도 엄마는 학생 건강상태 자가진단을 문제 없음으로 작성해서 제출했다는 이야기. 아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빠한테도 맞고 있었다는 사실. 그래서 학생들 상황을 세심하게 점검해서 오후까지 보고하라는 요청이 올라왔다.
내 머릿속에 몇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드라마 [시그널]. 연쇄 살인마가 되어버린 한 사람의 어린시절. 엄마는 아이에게 늘 말했다. “힘들지? 엄마가 편안하게 해줄게.” “이 가방 안에 들어가있으면 편안해질거야. 들어가서 있어봐.” 공포에 질린 아이를 커다란 가방에 밀어 넣고 가방 문을 닫아버리는 장면. 드라마속 아이는 죽지 않고 그렇게 커서 엄마를 시작으로 사는게 우울해보이는 수많은 여자들을 편안하게 해준다며 죽여버렸지만 현실속 9살 아이는 119에게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어 결국 이틀만에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긴 시간 도와달라고 누구든 와서 제발 날 살려달라고 외치고 외쳤을까. 왜 그 아이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 고통을 제대로 수신하지 못했을까.
생각은 꼬리를 물어 소설 [두친구 이야기]가 떠올랐다. 엄마가 목을 조르고 때린 흔적을 숨기기 위해 더운 날 조차 터틀넥 스웨터에 긴바지를 입고 학교를 다녔던 아이. 엄마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맞지 않기 위해 버림받지 않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처럼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살아간 아이가 기억났다. 이어서 아이를 때리고나면 얼굴에 멍이 가실때까지 다른 핑계로 학교를 보내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이(이웃, 학교, 친구들)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낄때쯤이면 누구든 개입할 수 없게 이사를 가는 것으로 관계를 끊어버렸던 엄마가 기억이 났다. 무엇보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 상황에서도 엄마를 미워할 수조차 없이 엄마를 이해하고자 엄마에게 사랑받고자 무던히 애썼던 그 아이가 떠올라서 가슴이 아팠다. 세상을 떠난 아이는 9살이었다. “저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어요. 지금 내 부모는 저를 학대하고 있어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란 언어를 갖기에는 너무 어리고 작은 9살 아이였단 말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보낼 설문 문항을 만들며 나는 집중해보았다. “너가 정말 아이들에게 묻고 싶은게 뭐니?” 그리고 질문을 만들었다. 집에서 컴퓨터 바라보며 지낸지가 2달이네요. 요즘 고민은 없나요? 혹시 외롭지는 않나요? 너에게 힘이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너를 아프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나요? 혹시 도와달라고 말할 사람이 주변에 없다면 나에게 연락해줘요. 꼭이요.
설문 응답을 살펴보면서 좀 더 자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는 아이들에게는 전화를 했다. 목소리로만 연결된 저편에서 작고 여린 목소리로 “요즘 좀 외로워요”란 목소리라 들려왔다. ‘외롭구나. 그래. 나도 외로워. 나도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사실은 많이 외로워.’ 외롭다는 말이 이렇게 슬픈 말이었던가. 쏟아지는 눈물을 휴지로 닦고 짐짓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롭구나! 어떻게 하면 외롭지 않을 수 있을지 우리 방법을 찾아보자. 내가 엄마랑도 통화해볼게. 좋은 방법이 있을거야.” 엄마에게 전화하여 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엄마도 나도 쓸만한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외로움에 취약하고 약자에게 때로는 잔인한 어른은 9살 아이의 죽음 앞에서 자기 자신의 폭력성을 돌아보며 옆에 여리고 약한 사람의 안부를 물어보며 하루를 살았다. 아이는 자기 죽음으로 그렇게 경종을 울려주었다. 그러나 우리집 아들은 말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아. 한두번이어야지.” 부끄럽다라는 말도, 그곳에 가서는 편안하라는 말도 차마 못 꺼내겠다. 그래서 조용히 마음속으로 아이에게 속삭였다. “아이야. 있잖아. 내가 부끄러운 어른으로서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 적어도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는 자주 물어볼게. 괜찮니? 힘든건 없니?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기억해줘. 잘가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