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이와 동행하기
단호박을 손질하다가 왼손에서 가장 쓰임이 많은 두번째 손가락 첫번째 마디를 우리집 가장 큰 칼로 베었다.
음식하다가 손가락을 베는 일은 잘 없었는데 철철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있자니(내 느낌으로는 철철. 누가 봤으면 뚝뚝이었으려나?) 내가 매우 위험한 일을 매일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걸 새삼 깨달았다.
다행이 피는 멈추었고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니 그제서야 밴드로 꼭 묶어 놓은 곳이 욱신거리고 따끔거렸다.
지혈시키고 밴드를 붙이고 젖으면 밴드를 갈아주고 괜찮은지 밴드 상태를 살펴보고. 내가 나에게 잘해줄 수 있는 돌봄 이상으로 남편은 칼에 벤 상처를 돌보아주었고 내 감정 상태를 살펴주었다.
그러나 칼에 베었다는 물리 적 충격이 나를 취약하게 만들었는지 "사춘기면 저래도 돼?"를 매일 갱신중인 아들과 딸이 주는 자극에 결국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지다가 내가 나를 가해하는 모습이 머릿속을 채웠고 더 이상 집이란 곳에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제일 빠르게 신을 수 있는 쓰레빠에 발을 우겨 넣고 집을 벗어났다.
가출이다. 충동적이긴 하지만 가출은 가출이다. 아무에게도 내가 왜 어딜 가는지 알리지 않고 나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살펴보니 쓰레빠, 바지, 팬티, 브라, 얇은 면티, 몇보 걸었는지 알려주는 시계가 전부였다. 물한잔 사먹을 돈도 없이 뛰쳐나온 샘이다. 아!! 귀걸이와 목걸이!!! 얼마 주고 샀더라? 정 안되면 금은방에 가서 이거라도 팔아야하나. 일요일에 금은방 문 여나? 아니면 찜질방을 가서 귀걸이 목걸이 내밀고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할테니 일주일만 재워달라고 해서 거기서부터 내 인생을 새롭게 계획해야하나? 그럼 일주일 뒤에는 어떻게 되지? 그런데 지금 몇시지? 이런 ...저녁할 시간이잖아? 가야겠네! 이런 우습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디 멀리도 못가고 우리집 뒷산 초입에 마련해 놓은 야외 쉼터를 빙빙 돌고 있었다.
이런 비장함이란 1도 없는 가출이었지만 1시간 가까이 나무가 뿜어내는 기분 좋은 향기와 새가 뽐내는 노랫소리에 파묻혀 걷고 걸었더니 다행이 집에 가고 싶어졌다. 물도 먹고 싶었고 다리도 아팠고 무엇보다 남을 해치거나 나를 해쳐야겠다는 생각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느낌이다. 아이들은 미친듯이 크면서 변하고 있고 나는 늙고 취약해져간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사춘기 아이를 사랑과 관심으로 품고 살아야 되는 중한 벌을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애 키우다가 환장해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으니 나도 뭐 어떻게 어떻게 해나갈 수 있겠지.
그나저나 당분간 칼은 안쥐고 싶다. 내 마음속 칼이 나를 할퀴는 것도 힘든데 진짜 칼까지 나를 다치게 하다니... 칼질 안하고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