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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May 09. 2020

어느 여름이 다가오는 밤

더 자유롭고 아름다운 밤이 오기를

#1. 일요일 19:00


- 밥을 달라해서 밥을 차렸고 그런데 그 밥을 1시간 있다가 먹는 상황. 왜 게임을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고 나와서 밥을 먹을 수 없는지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식기 전에 밥을 먹으라고 내가 왜 매달려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고 한시간동안 국이 식어가는 속도에 비례하여 서서히 쌓여가는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지 못해 결국 아들에게 다 집어던질 기세로 버럭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너 밥해주려고 태어난 줄 알아?" 그리고 어디가냐고 묻는 아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집밖으로 나왔다.




#2. 일요일 19:30


- 참나물을 무치고 두릅을 대치고 새콤달콤 초고추장 만들어서 아빠에게 가는 길. 조물조물 봄향 가득한 나물을 무쳐 고개를 한것 뒤로 젖혀 간을 볼때만 해도 아들에게 화내고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리라 예측하지 못했는데...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내일 드리면 맛이 없어질테니 지금 갖다드려야 한다. 15년도 더 전에 내가 살던 곳. 지금은 아빠가 혼자 사는 곳. 아빠집에 가는 길은 외지고 어두컴컴하다. 골목을 들어서는데 버려진 소파에 누군가가 앉아 있어서 기절할만큼 깜짝 놀랐다. 그러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내가 놀란 것 때문에 저 사람이 기분이 나빠서 나를 해꼬지 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빠르게 걸어들어갔다. 갑자기 확 짜증이 났다. 15년을 넘게 드나는 곳인데 나는 단지 아빠집에 가려는 것 뿐인데... 왜 오만 생각이 다 들면서 이다지도 무섭단 말인가. 실제로 15년간 어떤 일도 일어난적이 없는데 왜 나는 계속 무서워하는가. 이 공포심이 지겹다. 뭐라도 배우든가 뭐라도 들고다니던가 해야지 쩝.



#3 일요일 20:30


- 아빠 집에 들렀다가 친구 집에서 놀고 있는 딸을 데리러 가는 길이다. 딸은 공원에서 놀다가 6시가 다 되어 친구 집에 가겠다고 전화가 왔고 그냥 집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 놓기 시작했고 나는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냐고 성질을 냈고 딸은 울먹 거렸고 나는 데리러 못간다고 했고 딸은 알아서 오겠다고 했지만 결국 나는 딸을 데리러 가고 있다. 걷는 내내 영화 [쓰리빌보드]를 떠올렸다. 딸에게 미친듯이 화가 난 엄마는 집을 나가는 딸 뒤통수에 대고 "길거리에서 강간이나 당해라."라고 폭언을 했는데 딸은 그날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그 이후 엄마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쩝. 데리러 가야지.. 나는 쓰리빌보드의 프란시스 맥도맨드처럼 죄책감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세상과 싸울 용기가 없으므로...



#4 일요일 21:00


- 딸과 함께 집으로 걷는 길. 엄마는 딸에게 아들과 한바탕 한 사건을 이야기하며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의 고충에 대해 털어 놓았고 15년을 넘게 다니는 아빠집을 가면서 느끼는 익숙하고 끝 없는 공포심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이야기를 절절하게 했으며 쓰리빌보드 이야기와 함께 딸을 결국 데리러 오게 된 사연이 얼마나 심란했는지 설명했다. 그렇게 뜨거운 낮과 함께 찾아온 자유롭게 마음것 돌아다니고 싶은 밤은 시작되었고 2020년 여름밤은 더 많이 즐겁고 자유롭기를 바란다. 이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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