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도 정수기도 없었지만 등목과 전설의 고향이 있던 그때 그 여름!
나 어릴 적엔 어차피 그 어디를 가도 에어컨은 없었다. 냉장고는 있었지만 얼음 정수기 따위는 없었고 학교도 집도 선풍기가 전부였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에는 나에게는 세상만큼 키가 컸던 나무가 있었고 나는 그 나무를 보면 왠지 반갑고 힘이 나서 종종 뛰어 나무 그늘 밑으로 쏙 들어가 플라스틱 부채로 땀을 식히며 다리 쉼을 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서 집으로 가면 엄마가 “많이 더웠지?”하며 땀으로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내 앞으로 선풍기 얼굴을 들이대 주시고 부엌으로 가서 얼음을 동동 띄운 미숫가루를 갖다 주며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물었다.
그러다 저녁을 먹고 조금 선선해지면 아이들은 동네 공터로 모여들었고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다가 8시가 훌쩍 넘어 어두컴컴해지면 여기저기서 아이를 부르는 엄마들 목소리가 들려왔고 내일 또 재밌게 놀아야지 아쉬움을 달래며 동생과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이번에는 아빠가 마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땀에 절어 꾀죄죄한 나와 동생들을 옷을 홀딱 벗기고 찬물을 껸지며 씻겨주었다. 발을 동동 거리며 “아! 차거.” “아! 시원해”를 외치다 방으로 들어가면 엄마가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었고 그리고 나면 우리 셋은 모두 팬티 한 장만 입은 채 선풍기 바람을 쐬며 참외나 수박을 먹으면서 전설의 고향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엄마는 이부자리를 편 뒤 전설의 고향 광고가 시작하면 불을 꺼버리셨고 분명 너무나 더운 여름날이었지만 우리 셋은 모두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이불 밖으로 눈만 내놓은 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설의 고향을 보았다. 그러다 긴 머리 산발인 귀신이라도 등장하면 더 어린 동생은 아빠 등으로 후다닥 달라붙어 괜한 아빠 난닝구를 붙잡고 무섭다고 울었고 아빠는 커다랗고 거친 손으로 동생 머리를 쓰다듬으며 "허허 엄마 아빠 다 있는데 뭐가 무섭냐"하며 웃었다.
그러다 장마로 며칠씩 비가 오면 그 시절은 우산도 귀했던 건지 엄마는 동생이랑 쓰라며 우산 하나를 내주었고 집에 올 때는 물웅덩이와 세차게 불어오는 비바람 덕에 우산이 홀라당 뒤집힌 채로 나도 동생도 홀딱 젖어 집에 도착하곤 했다.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엄마가 해준 부침개를 먹으며 무섭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고 왜 우산을 동생이랑 같이 써야 하냐고 투덜거린 적 없는 걸 보니 그렇게 비 맞으며 집에 오는 길도 비 오는 날 집에서 머무는 시간도 우리에게는 놀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때도 여름은 참 더웠지만 어린 나에게는 즐길만한 무엇인 것처럼 느껴졌다. 더워서 불편했지만 더워서 서럽거나 창피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겨울과는 조금 다른 추억의 결들이다. 며칠 동안 세차게 퍼붓던 비가 그치고 말간 하늘을 보니 왠지 어릴 적 여름날이 생각났고 우리 아가들은 크고 나면 여름을 무엇으로 추억하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에어컨 바람 속에서 시원한 밀크티를 마시며 들으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에어컨도 정수기도 없던 어릴 적 그 여름이 왠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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