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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Jan 18. 2023

배변봉투가 불러온 놀라운 결과

“선생님. 저 성공 했어요!”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2년만에 복직을 앞두고 있다. 그간 교사로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알게 해준 사람과 사건을 끄적거리며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싶어졌다. 교사가 되고 가장 많이 생각났던 초등학교 4학년 선생님 이야기로 두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상에 욕이 있다는 것을 인지한 시기는 초등학교 1학년 즈음이었다. 쉬는시간 종종 ‘개새끼’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쁘면서 대단해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친구처럼 욕이란걸 해보고 싶어 ‘개새끼’라고 조용히 내뱉어보았다. 누가 들었을까봐 무서웠지만 동시에 내가 조금은 더 강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근사한 기분도 잠시, 집에 갔더니 외삼촌이 웃으며 나를 맞이했고 외삼촌과 엄마 사이에는 50권짜리 위인전집이 있었다. 엄마는 학교에서 ‘개새끼’를 읊조리고 돌아 온 나에게 훌륭한 사람 되라며 손에 이순신 위인전을 쥐어주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위인전을 읽다가 어느날 문득 궁금했다. ‘내 눈앞에 나래비를 선 저 50명은 살면서 욕을 한 적이 있을까?’ 나는 다급하게 그간 읽은 책을 꺼내어 뒤져보았다. 나처럼 여자고 그나마 어려 보인 유관순 위인전은 더욱 꼼꼼히 살펴보았다. 욕을 했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살면서 한 번도 욕을 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나는 대한민국에서 위인이 되고 엄마가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절대 욕을 하면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날 이후 달력의 날짜를 지워나가며 욕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일주일 즈음 되었을까? ‘개새끼’로 나에게 욕의 신세계를 보여준 친구는 ‘시발놈아’라는 욕으로 진일보하였고 선생님이 없는 틈을 타 이런 저런 욕을 하는 아이들이 제법 늘고 있었다. 나는 서글퍼졌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욕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물어보았다. “아빠. 욕 안하면 훌륭한 사람이 되서 위인전기에 나오는거야? 그럼 언제까지 욕을 안하면 되는거야?” 아빠는 말했다. “욕만 안하는게 아니라 더 훌륭한 일을 해야겠지!” “응??????” 


‘욕을 안하는 것만도 힘든데 그것말고도 훌륭한 뭘 더 해야한다고???’ 나는 훌륭한 사람을 안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 학교에 가서 나에게 못되게 구는 남자 아이에게 욕을 한바가지 해주었다. “야! 이 나쁜 새끼야! 나도 욕할 수 있거든!” 그러나 훌륭한 사람을 안하기로 마음 먹은 것 뿐이지 나쁜 아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3학년까지 나는 자주 내가 나쁜 아이처럼 느껴졌다.


1학년 받아쓰기 시간. 친구들은 90점, 100점을 받고 ‘개새끼’라고 말하던 친구도 80점을 받았는데 나는 70점을 받던 날. 나는 우리집 시커멓고 커다란 장롱을 마주보고 누워 혹시 내가 나쁜 아이이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울었다. 2학년 미술시간. 하늘색 옷을 입고 산 꼭대기에 서있는 나를 그렸는데 얼굴만 산 위에 동동 떠있다며 선생님이 웃던 날. 나는 집에 가서 하늘색 옷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엄마에게 이 옷 다시는 안 입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3학년 방학식. '잘함'은 몇 개 없고 ‘보통’과 ‘못함’으로 가득한 통지표를 받은 날. 나는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 내가 나쁜 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신발코를 한없이 모래에 처박았다. 내가 유관순 처럼 훌륭할 수는 없겠지만 욕도 종종 하지만 그래도 나쁜 아이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즈음의 나는 자주 슬펐고 의기소침했다. 


그러다 4학년이 되었다. 따뜻한 날로 기억한다. 주말 숙제로 배변봉투를 받았으나 주말을 포함 월요일 아침까지 노력하다 나는 빈손으로 학교에 갔다. 선생님은 봉투와 젓가락을 들려 나를 포함 몇몇 아이들을 화장실로 보냈다.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각오로 온힘을 다해 봉투에 넣을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너무 기쁜 나머지 교실 뒷문을 힘껏 열어 젖히고 봉투를 흔들면서 말했다. “선생님. 저 성공 했어요!” 책상에 가지런히 앉아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아... 쉬는 시간이 아니었구나...’ 


나는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급행열차에 올라탔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인채 봉투를 건내기 위해 선생님께 다가갔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선생님이 박수를 치며 소리를 치는게 아닌가. “해냈구나. 축하해.” 아이들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이후로 4학년은 내가 꽤 괜찮은 학생임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받아쓰기 100점은 못 받더라도 글은 제법 잘 쓰는 아이였고 큰 목소리로 발표는 못해도 내가 늘어놓는 솔직한 이야기가 수업을 더 재미있게 만들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날 늘 웃으며 바라보는 선생님을 많이 좋아했다. 


선생님이 결혼하던 날 나는 돈은 없었으나 무엇이든 해드리고 싶어 잘게 자른 색종이를 상자에 넣어 들고 갔다. 선생님이 퇴장하며 내 옆을 지나갈 때 색종이를 뿌려드렸다. 물론 팔도 짧고 생각도 짧았던 덕에 색종이는 내 옆에 있던 친구 머리로 다 쏟아졌고 뜻대로 안되 어쩔줄 몰라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퇴장해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4학년을 전환점으로 내 학교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훌륭한 유관순이 되지 못하는 받아쓰기 70점 나쁜 아이는 뭐든 할 수 있는 호기심 가득한 신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교사가 된 뒤 4학년때 선생님을 자주 생각했다. 나도 그 선생님처럼 웃어주고 박수쳐주고 엄지손가락 치켜들어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런 행동 하나가 어떤 아이에게는 삶을 바꿀만큼 큰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작은 행동 하나에도 진심으로 잔뜩 축하할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물론 노느라 바빠서 내 말 한마디에 1도 관심 없고 축하하는 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지만 여전히 나는 희망한다. 아이들이 나와 함께 있을 때 나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을 더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게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지금은 퇴임을 했거나 퇴임 즈음일 선생님. 1988년 서울 상계초등학교 4학년 강정미 선생님을 이렇게 기억하고 추억한다. 그리고 3월이 되면 나는 또 20명즈음의 어린 나를 만나러 교실로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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