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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다빈 Feb 03. 2020

오피스 스릴러

회의자료에서부터 시작된 현실 초밀착 공포물

* 오프닝(opening)


오후 5시 40분,
퇴근시간을 앞두고 붕 떠있던 사무실 분위기가 별안간 높아진 언성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걸 회의자료라고 만든 거야?!!
이걸! 이걸 아침 아홉 시부터 지금까지 하루죙-일 만들어서 갖다 줬단 거냐고?!!



고막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대수롭게도 과장님이었다.

이미 유체를 이탈해 둥둥 어수선하게 떠 다니던 여러 영혼들이 일제히 한 영혼에게 주목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두 영혼이었다.

 

* 드라마(drama)

사무실 내의 가장 큰 영혼이 내뱉는 뾰족한 말들이 앞에 앉은 작은 영혼의 가슴에 구멍을 냈고, 그 둘의 눈 앞으로는 큰 영혼의 손에 들린 하얀 서류 몇 장이 파닥거렸다.

그것은 치명상을 입고 추락하기 전 마지막 발악을 하는 곤충의 날갯짓과도 같았다.

어딘가 구멍이 뚫린 그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푸슈슝- 바람이 빠지며 급격히 쪼그라들었지만
큰 영혼의 질타는 사정없이 연속되었다.

그 질타의 인과는 명확했다. 그 안엔 실수나 잘못이 있었고, 약간의 덧없음이 들어 있었다.

결국 쪼그라든 작은 영혼은 더 쪼그라들다 못해 압착이 되고 말았다.

 

* 피날레(finale)

대화는 절대로 아니고 그렇다고 독백도 방백도 아닌 단막극 한 편은 몰아치는 긴장의 서스펜스로 관객들의 숨마저 훔쳐갔다. 정말로, 고요했다.

그들의 무대는 5시 57분쯤에 가까스로 막을 내렸다.

큰 영혼 역할의 배우는 매몰차게 무대를 떠났지만, 상대역은 느릿느릿 움직이며 그 모멸감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집에 가려고 했다가 엉덩이만 달싹거리며 퇴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짐을 싸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래 달아난 첫 번째의 뒤를 이은 두 번째 퇴근자가 되었다.

물론, 나는 인사를 하고 갔다.

극이 남긴 길고 진한 여운에 차마 엉덩이를 떼지 못한 다수의 관객들을 뒤로하고 집을 향해 가는 동안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노동자의 근로 소득은 시간을 팔아 얻는 '이란 말을 떠올렸다.

그것이 진정 시간만을 팔아 얻는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다고 생각하며 오늘의 역작에 점수를 매겼다.


작품성 별 한 개 반. (별 다섯 개가 만점이다.)

몰입도 별 네 개 반. (반복되는 대사가 많아서 집중력이 흐려졌다.)

공포감 별 다섯 개.

재관람 의사,  없음.


 

사진 출처: 드라마 '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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