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장수탕 선녀님], [문어 목욕탕]
딸이 셋인 집이었다. 목욕탕에 있어서라면 가족도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엄마와 언니, 동생이 목욕탕을 가면 아빠와 나는 주로 집에서 티브이를 보곤 했다. 얼룩말도 나왔다가 포청천도 나오는 그런 시간이었다.
가끔 아빠도 혼자 목욕탕을 가지만, 가나 마나 한 시간만큼만 있다가 이른 귀가를 한다. 목욕탕을 간 사람들을 기다리는 건 어쩐지 마음이 스산한 일이었다. 그저 몸을 씻으러 간 것에 불과하고 조금 상기된 볼과 윤이 나는 얼굴로 어김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도 말이다.
전염병에 대해 처음 생각한 건 열 살 때였다. 지금처럼 전 세계가 그것에 대해 매일같이 생각하게 될지는 몰랐다. 피부병을 가지게 되면서 자주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옮지 않아요. 옮지 않아요...”
여러 번 마음속으로 외쳤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다지고, 다듬고, 돌보면서도 누군가의 낯설고 차가운 시선을 견디는 것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목욕탕을 가지 않게 되었다. 서로 다른 밀도의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목욕탕이 나오는 그림책을 보면 무척이나 반갑다. 가본 적이 있지만 다시 갈 엄두는 쉬이 나지 않는다.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는 노인의 마음에 가까운 것일까?
그림책 [장수탕 선녀님]에는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 할머니가 나온다. 주인공 덕지는 처음 만난 선녀 할머니와 냉탕에서 즐겁게 한때를 보낸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고, 때를 밀고, 시원한 요구르트까지 완벽한 목욕탕 풀코스를 마친다. 냉탕과 요구르트,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 있을 선녀 할머니를 생각하면 목욕탕은 명랑한 단어가 된다.
또 다른 그림책 [문어 목욕탕]에서는 혼자 오는 아이에게 할인은 물론 문어가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목욕탕에 혼자 오는 어린아이를 기꺼이 반겨주고 환대해준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목욕탕이라는 세계는 어쩌면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경험이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낯선 세계의 질서를 배우고 경험하는 것. 특히 어린아이라면 누군가의 손을 잡고서야 또는 이끌려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다양한 이유로 목욕탕을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혼자와도 괜찮다고, 이곳에서의 경험은 안전하고 즐거울 것이라고 넌지시 말해주는 것 같아서 읽을 때마다 달짝지근한 위로를 받는다.
목욕탕에 관심이 아예 없지는 않다. 오히려 욕망하는 편이랄까. 사우나가 있는 헬스장이나 호텔을 가거나, 스파가 있는 휴양지를 가면 누구보다 더 은밀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다. 언제가 목욕탕 습격에 적절한 타이밍일까? 유추하며 온탕을 차지하는 것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한다. 문 앞에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가끔은 우연찮게 성공하기도 한다.
몇 해 전 온천으로 유명한 일본의 유후인을 여행했다. 크고 작은 온천이 여러 개 있는 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저녁과 밤, 그리고 이른 아침 세 번 야심 찬 목욕을 했다.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여기저기로 뛰어다녔다. 달도 봤다가 춤도 추고, 너른 바위에 누웠다가 자연을 만끽하면서 온천욕을 즐겼다. 한밤에 호젓한 온천욕을 하면서도 다음 입욕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산봉우리가 보이는 대욕장에는 이미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발길을 돌릴까 했지만 다행히 이른 아침의 노천탕은 멀리서 밀려오는 안개와 증기가 구름이 되어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서라면 괜찮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다 괜찮다는.
어느덧 모든 생각들은 수용성이 되어 물에 다 녹아버렸다. 수건을 용감하게 던지고는 한발 한발 물속으로 들어갔다. 수증기를 몸에 덕지덕지 바르고 물속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물고기 비슷한 것이 되었다. 작은 지느러미와 아가미 정도를 가지고 어디론가 나아가는 작은 무엇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