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돌고래씨 Feb 18. 2022

저마다 네버랜드 하나씩은

그림책을 읽는 어른입니다.

  어른들과 함께 읽는 그림책 수업이 3년 차에 접어든다. 도서관에 제출하는 그림책 강의 계획서에는 0세부터 100세까지 생의 주기에 따라 즐기는 그림책 읽기를 포부로 밝혔다. 나이 막대기를 두고 봤을 때 이제 절반에 가까워지는 삶이지만 남은 시간도 지금처럼 그림책과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과 안도감이 든다. 그림책은 인생에 세 번 읽는다고 한다. 유년기에는 부모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보고 듣고, 언젠가는 양육자가 되어 다시 아이에게 읽어주고, 그리고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며 그림책과 삶을 포개어 읽어나간다.   

  

  물론 모두에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이와의 유대와 정서발달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말랑말랑한 다정함이 모든 가정에 고루 분배되지는 않으니 말이다. 와락 안기고 싶었던 부모의 품에는 이미 저녁의 고단함이 먼저 안겨 있는 집도 있을 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함께 살 수 있는 생활공간과 넉넉한 저녁상, 계절에 맞는 옷만으로도 족했던 시절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림책을 좋아하지만 아이를 양육하고 있지 않은 나와 같은 어른도 있을 것이다. 그림책을 읽는 어른들에게 누군가는 말한다. 아이들의 것까지 탐내는 것 아니냐고 슬며시 눈치를 준다. 수많은 어린이 자료실에서 불렸던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냉장고에 낀 성에처럼 부지런하게 긁어낸다. 나이를 벗어나 둥글고 다정한 마음을 가지고, 그림책의 세계로 서슴없이 건너오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뉴스를 견디는 일도 조금 더 쉬울 것이다.      




   그림책을 읽는 것은 우리 삶에 다정한 위로와 응원을 어김없이 가져온다. 그림책 속 주인공들은 초인적인 힘을 가진 마블 영화 속 주인공과는 사뭇 다르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꼬마의 모습,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나오기도 한다.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아이, 날아오를 수 없는 비둘기,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 속에서 반달처럼 쪼개진 아이. 비가 오는 날, 치과 가는 길, 새 학기가 다가오는 것, 그 어느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고 연약한 친구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넘어지거나 비틀거리기도 하지만 무릎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고 일어난다. 우산 없이 빗속으로 뛰어든다. 마침내 스스로의 힘을 찾아내거나 기꺼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제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낸다.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민 어린아이에게는 그림책이 튼튼한 공기 방울 같은 안락지대가 되어 줄 것이다. 그 속에서 먼저 배우기도 할 것이며 나중에 깨닫기도 할 것이다. 주인공의 모습에 스스로를 투영해 뜨거운 용기를 얻을 수도 있고 초록빛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아이뿐만 아니라 나이 든 어른을 위해 또는 스스로를 위한 그림책은 어떠할까? 어른이 되면 한때 아이였던 모습의 일부는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      




   몇 해 전 어버이날 부모님에게 그림책 [파랑 오리]와 [할아버지의 바닷속 집]을 소리 내어 읽어드렸다. 다 큰 딸이 읽어주는 그림책을 귀 기울여 듣고는 엄마가 아빠에게 수줍게  말했다.

“여보, 우리가 다시 아이가 된 것 같네요.”     


부모의 부모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이런 순간과 비슷하겠다고 생각했다. 야윈 부모의 얼굴 뒤에 숨어있던 작은 아이의 얼굴을 찾아냈다. 언젠가 그들이 나에게 건넨 따뜻한 눈길로 인사를 건넸다. 그 뒤로 줄기차게 가족들을 모아놓고 그림책 읽기를 시작했다. 남편, 동생, 제부, 언니, 형부, 시어머니, 시누이,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렇게 연결된 사람들에게 그림책 속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기가 있었다. 제사를 지내며 어른들처럼 말로 인사를 건네지는 못하지만, 그림책은 읽어드릴 수가 있었다.      


  몇 년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찾아낸 가장 좋은 독자와 청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나에게 읽어주는 이야기, 부모가 읽어주었던 기억은 전무하고, 아직 부모가 되지 못한 내가 스스로에게 만들어주는 안락지대. 피터팬을 꿈꾸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네버랜드 하나 즈음은 갖고 싶다. 그림책 처방과 효능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 스노볼처럼 환하고 빛나는 그림책의 세계. 돌파하는 힘이 있고, 살려내는 힘이 있다. 오늘을 살고 내일을 꿈꾸게 해주는 그 세계에서 그림책 요정이 되리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