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와 어린 동생 by 쓰쓰이 요리코
가끔 동생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기억에서 나는 창밖에 서있는 유치원생이 되고, 동생은 창가에서 나를 바라본다. 유치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방실거리는 동생의 모습. “언니야~~”라고 외치며 베란다 창가에 서서나를 반기며 방방 뛰는 동생이 사진처럼 영원하다.
의기소침하고 소심하던 십이월 생 꼬마에게는 유치원 생활이 마치 어른의 직장생활 같았다. 천진하게 즐거운 시간보다는 마음이 어긋나고 삐걱거리는 시간들이 많았다. 마이너한 유치원 생활을 하고 돌아오던 퇴근길을 환하게 밝혀주던 어린 동생의 인사는 한여름 모래알처럼 반짝였다. 억센 친구들의 등살에 누워있던 마음도 번쩍하고 일어나게 했다. 저렇게나 내가 반갑고 좋을까 생각하며, 발걸음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만큼만 빨라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동생의 인사는 여전히 싱싱하게 귓가에 울린다.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유한 멋과 맛이 있다. 그림책의 시간에 나의 시간을 겹겹이 투영해서 본다. 또는 나와는 다른 시대와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뚝 떼어 내어 준다. 가끔은 한참 뒤에 다가올 일들을 고요히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책의 물성과 문자 텍스트의 한계를 벗어나 시각적 환기가 즉각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굉장하다. 글은 입으로 귀로 전해지고 그림은 눈을 통해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다.
이 모든 것의 화학작용으로 그림책 [순이와 어린 동생]을 보면서 미지근한 눈물이 흘렀다. 순이와 영이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나와 동생의 시간도 그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내가 순이가 되고 나의 어린 동생은 영이로 그림책 속에서 재현되었다.
순이의 엄마는 외출하며 집 앞에서 놀고 있던 순이에게 집을 잘 보고 있으라 당부한다. 이윽고 쏟아지는 영이의 울음소리에, 순이는 길바닥에 기찻길을 그리며 칙칙폭폭 기차놀이를 하자며 동생을 어르고 달랜다. 기다란 기찻길을 다 그리고서야 고개를 들어보니 아뿔싸, 동생 영이가 없다. 그때부터 순이는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동생을 찾는다.
어릴 적 우리 동네는 아이들이 우르르 구슬처럼 쏟아져 사방팔방 굴러가며 놀았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듯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다양한 놀이를 하면서 만두소처럼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은 딱총으로 참새를 쏘아 맞추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은 온 동네에 딱지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가 오면 물총 싸움을 하고 절기에 따라 쥐불놀이까지 살뜰히 챙겼다. 어디서 구했는지 분유통을 구해 구멍을 내어 손잡이를 만들고 솔방울을 가득 넣어 불을 지피고 신나게 흔들어댔다. 색종이처럼 알록달록한 놀이로 가득 찬 유년시절이었다. 이렇게 즐거운 놀이시간에 가장 고역이었던 건 어디든 나를 따라다니던 어린 동생이었다. 동생을 피해 이리로, 저리로 뛰어가고 숨고, 동생은 또 언니야 하면서 눈물을 쏟아내며 따라온다. 동생이 너무 울거나, 짠해 보일 때면 그제야 손을 잡아주거나 안아주면서 눈을 맞춰주었다.
동생들보다 친구들의 눈치를 더 보았던 못난 언니여서 미안하다. 성가신 동생을 밀어낸 오래된 마음에 미안함이 도깨비풀처럼 촘촘하게 박혀있어 이 그림책을 보고 그렇게 다 식어버린 눈물이 났나 보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졸졸 따라다니지 않는 씩씩한 동생이지만 언젠가 다시 어린 우리가 되어 만난다면, 망설이지 않고 힘껏 달려가서 와락 안아주고 싶다. 다시 가벼워진 동생을 등에 업고 다정한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