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8개월 차 백수의 독립출판으로 내 책 만들기
샘플북 수령을 마지막으로 마침표를 찍은 책방연희에서 6주간 진행된 <독립출판으로 내 책 만들기> 9기. 수업이 끝나면 원하는 책이 뚝딱 나오는 줄 알았건만. 물성이 있는 책 권을 출간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책과 가장 잘 어울리는 내지와 표지 용지를 고르고 디자인도 확정해야 하고, 무명작가의 첫 책을 알릴 텀블벅 펀딩과 독립서점에 입고하기 위한 메일 작성까지. 막막하지만 어찌하겠는가. 회사를 박차고 나온 7개월 차 백수에게 남은 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과 묶이지 않은 몸뿐. 백수의 특권을 적극 활용해 보기로 했다.
노트북을 펼쳐 강사님이 수업 시간에 공유해주신 인쇄소 리스트가 적힌 PDF 파일을 열었다. 내지로 많이 사용하는 재생지 ‘그린라이트’ 용지를 취급하는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열 군데가 넘는 인쇄소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린라이트 용지를 취급하는 곳 세 군데를 찾았다.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실시간 견적과 그렇지 않은 곳은 메일로 문의해 견적을 받아본 뒤 한 권도 뽑아주는 인쇄소를 찾아 샘플을 먼저 뽑아봤다. 책 내지 용지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다고 하는 미색모조 80g, 100g으로도 뽑아보고 글자 크기도 끼웠다 줄였다, 자간도 이리저리 조정해 보면서 용지와 디자인을 정했다.
마흔두 편의 짧은 글과 사진으로 구성될 여행 에세이인만큼 표지는 치앙마이의 평온한 분위기가 담긴 사진으로 디자인하고 싶어 주변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로 했다. 치앙마이에서 찍어온 사진 여덟 장을 골라 표지를 디자인해 반응이 가장 좋은 두 개 중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와 더 잘 어울리는 표지를 선택하고 내지 용지와 서체, 서체 크기도 확정했다.
마지막 관문. 1쇄로 몇 부를 뽑을 것인가. 최소 100부에서 200부는 뽑아야 단가가 맞을 거라는 강사님의 조언과 인쇄소 견적을 바탕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본 결과, 200부는 뽑아야 최소한 마이너스 수익은 아니겠다는 무명 작가의 판단.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책을 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손해는 보고 싶지 않은 수입 0원 백수의 간절한 바람. 뽑긴 하겠는데 과연 이 많은 부수를 전부 입고하고 판매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우선 저질러보기로 했다.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거니까.
표지에 내 이름 석 자가 떡하니 적힌 책이 서점 매대에 올라가 있는 장면을 그려봤다. 욕심이 생긴다. 누구에게나 귀중한 돈을 지불하고 구매한다는 생각에 닿은 이상 절대 대충 만들 수 없었다. 나를 옥죄이고 억누르는 게 아닌 기분 좋은 책임감이었다.
성에 찰 때까지 원고를 수정하고, 표지와 내지 디자인을 다듬고, 용지도 바꿔보면서 샘플북을 뽑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결정을 하면 그 뒤를 이어 결정해야 할 것들이 끝도 없이 줄 서 있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결정해야 하는 건 나였다.
스스로 내려야 하는 결정들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모든 과정을 즐기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한 가지였다.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억지로 한 게 아닌, 내면 깊숙이 숨어있던 욕망을 꺼내 하고 싶은 걸 한 거였으니까.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지날 때마다 경험치가 쌓여 레벨업이 되는 것처럼 텅 빈 마음에 충만함과 행복감이 조금씩 차올랐다.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작고 귀여운 고민일 뿐이었다.
조급해하지 않고 눈앞에 놓인 할 일을 묵묵히 하다 보면 모르는 새 이미 많은 걸 해낸 나와 마주할 거라는 믿음 하나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