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는 아픔을 극복했다 2
철학이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철학을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 했고, 누군가는 지혜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 했으며, 누군가에겐 깨우치고 성장하기 위한 생각의 도구이고, 누군가에겐 지성과 학문이 되는 철학. 여러 철학자들이 철학에 대해 내리는 정의들을 살펴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철학은 각자에게 필요한 대로 여러 가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는 만능 도구라는 것이다. 마치 어떤 책 한 권이, 함께 대화를 나누는 친구도 되고, 내 생각을 깨우쳐 주는 스승도 되고, 내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도 되었다가, 내 마음을 공감해 주는 위로도 되고, 가끔은 베개도, 라면 냄비 받침대도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생각하면 할수록, 철학은 내가 세워가는 나의 내면 나의 세계 그 자체, 나의 글과 말로 드러나는 나의 소신 그 자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철학이 내 안에선 그런 의미로 이해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나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없고, 나 혼자 동떨어지고 외롭고 힘들 때, 철학은 내 곁에 더욱 바짝 다가와 내 손을 잡아준다. 내가 미움을 받고 고립되는 일이 있어도, 때론 내가 남과 다른 내 모습 그대로를 지키기 위해, 내 소신 내 철학을 지키기 위해, 나의 고립은 나에게 옳은 것이라고 내 마음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준다.
스피노자의 고립
자신이 깨닫고 이해하는 대로 철학을 펼칠 자유와,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루는 소신을 지켜야 했던 철학자가 있었다. 의견만 굽히고 바꿔주면 돈까지 주고 없던 일로 해 주겠다는 집단의 회유에도, 소신을 지키는 쪽을 선택하고 철저히 혼자가 되는 지독한 고립을 기꺼이 받아들인 철학자가 있었다. 그 철학자는 바로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앞이 창창한 젊디 젊은 날, 그의 나이 25세에, 자신이 속한 유대교회로 부터 심히 잔인한 저주와 함께 불명예스러운 파문을 당했다. 그의 가족은 포르투갈에 살던 유대 혈통 집안이었는데, 가족 중 마녀사냥을 당해 죽은 사람이 있었을 만큼 심한 종교적 핍박을 경험했던,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네덜란드로 도피성 이민을 온 사람들이었다. 다시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존재가 되지 말자고, 열심히 노력하여, 암스테르담의 유대교회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사회 안에서 잘 자리 잡았다. 스피노자 아버지의 사업도 꽤 성공하여 형편이 풍족했으며, 스피노자도 어릴 때부터 학문적으로 출중한 실력을 보여,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거나, 유대교 목사 (랍비)가 되어도 좋겠다고 주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젠 모두가 안심하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겠다 평탄대로가 펼쳐져 있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주변의 기대와 자신의 꿈이 이끄는 대로 스피노자는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리한 스피노자는 성경을 이해하면 할수록, 유대교회 지도자들이 하는 말과 성경 내용 사이에 틈이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게 된다. 자신이 믿었던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 균열은 곧 주변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다. 그가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비판하고 다닌다는 게 알려지면서, 스피노자는 결국,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유대교회로부터 신을 부정하고 교리에 어긋나는 언행으로 교회 안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유대교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당했다. 장로들이 스피노자에게 돈을 주고 회유하려는 시도도 했으나 그는 소신을 지키고 파문 징벌을 감수하는 쪽을 선택했다.
유대교회는 스피노자를 파문하면서 지독한 저주를 퍼부었다.
그는 낮에도 저주받고 밤에도 저주받고 나갈 때도 저주받고 들어올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님의 노여움과 증오가 이 자를 향해 불타고 율법서에 기록된 하늘의 모든 저주를 이 자가 짊어지게 하시고 하늘 아래에서 이 자의 이름을 지워버리소서.
- 1656년 7월 27일, 스피노자가 유대교회의 종교의식에 따라 파문되었을 당시 기록된 파문 문서 내용 중에서 -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가까이 아무도 가지 못하게 유대인 사회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글로 교류해서도 안되고, 도와주어서도 안되고, 한 공간 안에 같이 있어서도 안되고, 스피노자가 쓴 책을 읽어서도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스피노자 외에는 자신이 애써 뿌리내리고 속한 사회의 뜻을 거스르고 고립되기를 선택할 용기도 의지도 없었으므로, 결국은 가족도 친구도 모두 스피노자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스피노자는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 그의 세계였던 모든 것에서 철저히 버림받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아프고 무섭고 떨렸을까. 아무 꿈도 뜻도 펼쳐 보기 전에, 절대 상종해선 안될 저주받아 마땅한 말종 인간으로 낙인찍히는 고통, 그 불명예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분리와 철저히 혼자가 되는 절대 고립의 고통이 얼마나 아프고 절망적이었을까. 가족과도 헤어져 살아야 한다니, 웬만한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할만한 상황이라고까지 생각된다. 심지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고 싶은 어느 광신도가 스피노자를 죽이겠다고 달려들기도 했지만, 그는 죽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원망이나 자기 연민에도 빠지지도 않고 스스로를 굳건히 일으켜 강하게 살아남았다.
그는 광학 렌즈 깎는 기술을 배워, 생계를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현미경이나 망원경은 지금의 스마트폰, 스마트 티비 수준의 신기술을 상징하는 인기 품목이었고, 렌즈는 그 제품들의 중요한 부품이어서 벌이가 나쁘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을 펼치는데 데카르트식의 문제 분석 방법론에 영향을 받아 과학적(기하학적)인 증명 방식을 사용하고, 과학적 인과관계의 이해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만큼, 당시 최신 과학 최신 기술인 '광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렌즈 깎는 일을 기꺼이 직업으로 선택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떨어진 어느 마을 외딴집 다락방에서 은거하며 1675년 타계할 때까지 이 광학 렌즈 깎는 일을 계속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갔다고 전해진다.
스피노자가 다시 일군 사회
스피노자는 삶의 의지를 가지고, 일하지 않는 시간엔 독서를 하고 철학 연구를 하며, 자신의 내면을 세우고,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 나갔다.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인간이 이성으로 인지할 수 있는 길이 면적 부피를 가지는 물질에 대한 설명에 그치는 데카르트의 세계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저서 <에티카>를 예로 들자면, 신과 정신, 인간의 감정, 자유까지 인과적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는 신념을 토대로 하여, 수학적 증명을 시도하고 있다. 여러 분야에 걸쳐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현대 학문의 토대를 만들었다.
스피노자에게 가족은 없었지만, 점점 그의 철학에 심취하고, 그의 온화하고 겸손한 인격에 반한 사상적 추종자 지지자들이 생겨나고, 덕분에 그는 점점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얻었다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이 대대로 우리에게 내려와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에 이 문장을 먼저 쓴 바 있지만, 그의 의미는 스피노자나 현대적 의미와 많이 다르다.)
사회와 교류해야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인간의 마음이 만족하고 채워질 수 있다는, 더 나아가 인간에겐 타인과의 교류가 꼭 필요하다고 외치는 이 말이 이젠 더 이상 사람들과 부지런히 인맥을 쌓아가야 한다거나, 사람을 많이 만나고 살아야 한다는 등의 얄팍하고 진부한 의미로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 같은 고립 후에, 심하게 갈증 난 그 외로운 마음에 드디어 교류와 소통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을 때의 그 감사와 기쁨이 그 충족감과 행복감이 깊이 느껴지는 뼈아픈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소통의 길이 열리고,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 지지자들이 생기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돈을 받기도 했고,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하숙집 주인 가족과도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고도 전해진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을 한 적도 있으나, 결국 스피노자가 거절했다는 사양 편지 기록이 남아 있다. 한 번 큰 이별과 고립의 고통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겨우 다시 일군 식구들(피를 나눈 관계는 아닐지라도) 주변 사회를 떠나지 않는 법이다. 세상 어디에서 불러도 내가 겨우 맨땅을 일구고 뿌리내린 이곳, 나의 제2의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스피노자는 절단된 몸으로 강제로 쫓겨와 겨우 뿌리내린 자신의 평화롭고 작은 생활을 결코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자유
스피노자는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교회가 신은 전혀 느낄 수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놓고 모든 교리를 만들어 나간 것이었다면, 스피노자는 신이 창조한 이 세상 만물이 신의 표현이기에, 그의 표현들을 잘 관찰하고 연구하다 보면 신도 이해해 나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을 한 것이었다.
작은 생각의 차이 같지만, 신을 맹목적 믿음의 대상이 아닌 이해할 대상으로 놓는다는 것은, 기존의 교회 교리 전체를 뒤집고도 남을 발상이었다. 태양이 아닌 지구가 돈다고 하는 갈릴레이의 한마디 말처럼 기존의 질서와 세계관을 뒤흔드는 생각이었기에,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을 당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것처럼, 스피노자도 유대교회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인간이 인간의 생각을 심판하고 억압할 수 있던 세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생각이 다른 것의 책임, 보편적이지 않은 소신의 책임은 그렇게나 크다. 소신은 곧 자신이 속한 사회가 쌓아 올린 보편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혁명이고, 혁명가는 보편성을 자신의 내면 체계의 기반으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뱉어내야 할 뜨거운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남다른 이해와 발상이 불러일으킨 결과를 충분히 이해했고, 사회가 내리는 징벌을 기꺼이 감수한 것이다.
나는 평화를 깨는 자가 되지 않고 철학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지 못한다. (I do not know how to teach philosophy without becoming a disturber of the peace.)
스피노자는, 자신의 철학이 사회 보편성이라는 평화를 깨는 혁명이라는 것을 잘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유대교회 교리에 균열을 일으키는 신을 바라보는 관점에만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최초로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으며, 개인의 자유와 복지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는 고립을 당한 것이 아니라, 집단 속에서 보편성에 맞추려고 개인 생각의 자유를 억압당하느니, 다른 모든 걸 다 잃더라도 자유를 지키는 쪽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고매한 활동은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배움이다. 이해할 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The highest activity a human being can attain is learning for understanding, because to understand is to be free.)
스피노자는 평생 고립된 사람이 아니라, 평생 자유를 선택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평생 배우고 연구하고 이해하는 삶을 살며 자신의 내면을 자유롭게 세워갔다. 어떤 가치가 맞바꾸자고 유혹을 해와도 그는 결코 그의 자유를 내어주지 않았다.
나는 스피노자의 삶을 보면서, 그에게 철학은 자신의 내면이고, 소신이고 자유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목에 칼이 들어오는 위협을 받아도, 모든 가진 것을 잃어도 , 자신이 의지하고 있던 세상이 뒤집어져도, 자신의 내면세계의 자유, 남의 생각이 아닌 자신이 깨달은 바 소신을 따르는 철학의 자유를 지켰다.
당시 그를 둘러싼 세상은 그의 철학 -새로운 개념 창조- 이 일으키는 세계관의 균열의 조짐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지만, 후세인 우리는 모든 만물 대상에 대해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의견을 억압당하지 않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철학 바탕 위에서, 그가 깨서 벌려 준 틈 덕을 보며 소신껏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스피노자가 겪은 희생과 고통이 지금 내가 누리는 이 든든하고 거대한 자유가 자라는데 밑거름 양분이 된 것을 깨닫는다. 이 자유의 나무가 자라는 것을 억압하고 억제하는 쪽이 아닌, 더 잘 자라게 돌보는 쪽으로 나의 삶과 내 정신에도 충분한 혁명이 일어나야 하리라고 느낀다. 내 생각을 더 당당하게 말하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더 자유가 충만한 사람으로 변화해가고 싶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SplitShi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