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트온 Dec 09. 2021

수치심을 걷어내고 존재의 본질을 찾아낸 키에르케고르

철학자는 아픔을 극복했다 4

출생의 그림자


키에르케고르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였다. 아버지의 본처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사망했고, 아버지는 가정부와 정을 통하여 일곱 자녀를 낳았다. 그중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가 57세, 어머니가 45세에 낳은 막둥이였다.


태어나보니 아버지는 어머니도 자식들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 종교 원칙에 사로잡혀 있는 아버지는 엄격하기만 하였다. 그 엄격한 잣대를 자신에게도 들이대니, 가정부와 부부처럼 살며 자식을 줄줄이 낳은 자신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늘 절망 상태의 감정을 뿜어내,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로 온 집을 감쌌다.


아버지가 말하지 않아도, 키에르케고르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식들을, 그 관계를 얼마나 수치스러워하는지.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의 의미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가 신앙관이 뚜렷한 사람이었던 만큼, 어린 키에르케고르도 신앙 속에서 자라났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 안에 신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혀 갔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절망은 자기를 있게 한 신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상태, 즉 자기 소외를 말하며, 여기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생명 상실을 의미하고 있다.


절망에 이르지 않고 생명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신 앞에 홀로 서서 신과 독대를 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내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고, 나의 본질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이유로 키에르케고르는 객관적 지식으로 인류 전체의 진보를 꿈꾸는 헤겔 철학 - 당대 근대 철학의 주류였던 - 이 철학 사상을 발전시키는 듯 보일지 몰라도, 실은 내면세계를 확립해 가는 인간의 주체적 능력, 개인의 힘, 개인의 존재 의미를 퇴고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철학의 방향성 자체가, 존경받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보편적 사고방식, 보편적 객관성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과 진리를 개인 스스로 탐구해야 하는 기회와 능력을 점점 앗아간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 외부적 기준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다른 독보적인 존재인 내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지극히 개인적으로- 오직 신과만 함께 하며 - 결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주장하고 있다.



개인의 사명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사명을 찾는 일에 매우 진지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나이 27세쯤(1840, 그가 코펜하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마쳐갈 때쯤), 1년 전 약혼을 한 정혼자에게 갑자기 파혼을 선언하고 덴마크 코펜하겐을 떠나, 독일 베를린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자신의 사명을 위해 결혼과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약속을 깨버려야 할 만큼, 그가 좇던 사명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간절한 마음이 되도록 만들었을까.


키에르케고르가 믿었던 자신의 사명은 이후 그의 행보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는 가명을 사용하여 수많은 책을 써서 발표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공포와 전율>

<불안의 개념>

<인생길의 여러 단계>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비문학적 해설문>


위의 책들 대부분은 헤겔 철학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근대 철학사상의 흐름을 보면서 이것은 안된다는, 막아야 한다는 사명을 느꼈던 것일까. 이 이후에 그가 편 책들도 살펴보자.


<죽음에 이르는 병>

<기독교의 훈련>


이 두 책에서는 당시 덴마크와 독일 사회 - 키에르케고르가 몸담았던 세상 -의 주류였던 루터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는 철학의 방향과 신학의 방향에 모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니라는,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들 사상적 학문적 흐름에 부딪쳐 맞서는 것이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몸 바칠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특정 직업을 가지지도, 가질 생각도 없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에 의지해, 그 돈을 모두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만들어 발표하는 일에 다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왜 가명으로 책을 썼나


키에르케고르가 많은 책을 발표하고 난 이후 어느 날, 그가 가명 출판을 한 것이 코펜하겐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엄청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같은 신문에 자신의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가명으로 글을 쓴 이유를 해명하고, 동시에 <기독교 세계 공격>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 덴마크 기독교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자신이 쓴 대부분의 책을 가명으로 출판한 이유는, 각자의 진리는 각자에게 주관적인 것이며,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진리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을 써서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주관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자신의 철학적 소신에 반하는 것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주관, 자신이 찾은 인생의 진리가 익명의 개별 사례로 인식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토록 타인이 찾아낼 인생의 진리들을 존중하고 있었던 것이며, 자신이 타인에게 너무 큰 영향이 되기보다, 각자가 자신만의 소중하고 진정한 삶을 찾아 가는 길에 작은 영감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가 그토록 사람들에게 간절히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만의 진정한 삶'을 찾아 일구고 살라는 것이다.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개인은 각자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방법을 찾고 실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가 당대의 국가 교회인 루터교의 방식에 반대한 것도, 이런 '진정한 삶'을 추구해 나가는 데 있어 개인의 몫과 힘을 무참히 짓밟고, 모든 것을 교회가 정해주는 교리를 따르고, 공동 예배라는 절차를 통해 모든 것을 교회 시스템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해야 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공동 예배 공동 시스템에 의존하는 것 또한 인간의 죄에 불과하다고 교회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란 그 자체로 너무나 숭고한 것이고, 그 속의 진리는 너무나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것이어서,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기도 조심스러울 지경이라고 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마틴 루터를 잇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고,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지만, 그는 이런 이름들로 묶어 둘 수 없을 만큼, 다른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방향과 무척이나 다르게 독보적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성을 향해 이성으로 접근하는 반면, 키에르케고르는 신 앞에 혼자가 되는 초월성을 향하고 있다. 그는 철학과 신학 둘 다를 매우 싫어하고 비판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그의 생애 동안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사상이 너무 급진적이고 새롭기도 했지만, 덴마크어로 저술한 책들이 유럽 사회에 퍼지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그의 전집들이 다 출판되고, 철학 사조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영향


피할 수 없었던 출생에 관한 수치심과 결핍감을, 존재에 관한 본질 진정한 삶을 찾는 보다 숭고한 과정으로 거뜬히 이겨낸 키에르케고르. 그는 자신이 발견한 자신을 위한 진리를 사람들과 나누며, 진정한 삶과 죽은 삶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으며, 육신이 아닌 나 자신의 영혼이 죽는 그 절망, 그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수없는 청년의 시간을 고민했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신 앞에 단독자'로 선다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수없이 신을 부르며 찾아다니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었다. '신 앞에 단독자'의 길에 결국 들어서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 개인의 진정한 삶을 찾고 사명을 찾아 그 길을 끊임없이 걷고 있는 지금, 나는 내 삶에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고 있다. 그를 알았던 덕분에 나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종류의 철학과 신학, 각종 종교 시스템의 방향성을 항상 점검하도록 미리 경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날 나의 멘토가 되어 주었던 키에르케고르에게 무척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대문 이미지 출처: drawing by Niels Christian Kierkegaa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