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트온 Dec 05. 2021

사(死)의 공포를 생(生)의 기쁨으로 다시 쓴 니체

철학자는 아픔을 극복했다 5

나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사람의 힘


나의 이야기를 내가 다시 쓸 수 있다는 깨달음이 왔던 때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의 이야기는 언제든지 재해석될 수 있고, 지난 이야기는 버리고 새로운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으며, 나의 이야기를 멋지게 끌고 갈 주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임을 깨달으면서 나는 내 인생에 대해 가진 나 스스로의 힘을 발견하였다. 인간은 정말 막강한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구나, 부족함과 죄책감에 눌려 무기력과 우울에 빠져 있을 존재가 결코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모든 것을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기꺼이 펼치며 강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필요할 때마다 변신술을 부리는 마법사처럼, 나 자신의 정체성을 거듭 재정의 하면서 거듭 변형하고 변화하면서 나아갔다. 그런 나를 보며 철학을 공부하는 어느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니체 그 자체구나! 


나는 니체에게 관심이 생겨났고,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죽음의 공포로 시작된 니체의 삶


니체는 1844년 프로이센 (지금의 독일)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4대에 걸친 루터교 집안으로 집안에 성직자만 20명 가까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849년, 니체의 나이 다섯 살에 뇌 질환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니체 아버지의 나이 고작 36세에 당한 급사였다. 그 이듬해 1850년엔 니체의 남동생 요셉이 죽었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이 그의 최초의 기억과 감정을 지배했다. 


게다가, 1870년에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에 의무병으로 참전해서 목격한 수많은 처절한 죽음들은 니체에게 심한 트라우마로 남았고, 병(뇌종양이나 뇌암으로 추정)으로 전쟁에서 귀환한 이후 죽을 때까지 두통에 시달리다 보니, 그의 뇌리에서 죽음의 공포가 떠날 일이 없었다. 죽음의 두려움이 너무 심해서 그는 도저히 그 감정을 그대로 안고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급기야는 언제든 죽을 수 있겠구나 죽음을 각오하기에 이르렀다. 



생의 기쁨을 피워낸 니체의 삶


니체가 죽음을 각오해 버렸다고 해서 삶의 의미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죽음에 집중하는 대신,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이 순간을 기뻐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자신의 삶 이야기를 다시 써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니체는 살아가면서 되는 일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없는 지지리 복 없는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아빠, 자신의 롤모델이자 분신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년기 내내 함께 놀고 어울려 지내던 친구였을 남동생도 일찌감치 죽고, 기대를 안고 입학한 신학대학에서 적응에 실패하여 1년 만에 다른 학교로 옮겨가야 했으며,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좋아하게 되는 여자에게마다 매번 거절당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야 했는데, 젊어서부터 덜컥 몹쓸 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니, 이렇게 불운한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그는 불운을 행운으로 다시 썼다. 그는 오히려 아파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 사유하고 철학 연구에 몰두할 시간이 많아졌으며, 아픈 만큼 삶과 죽음을 치열하게 고민할 성장 기회를 얻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얻은 병을 축복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산다는 건 고통을 겪는다는 뜻이며, 살아남는다는 건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뜻이다. (To live is to suffer, to survive is to find some meaning in the suffering.)




니체에게 죽음은 삶의 끝에 일어나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었으며, 삶의 스토리를 완성하는 중요한 구성요소, '마지막 대단원'이었다. 그러니 삶을 완성시킬 죽음을, 죽음까지 늙고 병들어 가는 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더 이상 걱정하지 말자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사랑하는데 집중하자고, 현재 건강하게 살아있는 기쁨만을 충실히 느끼자고 그는 조언한다. 죽음까지도 진정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진정으로 삶도 기쁘게 누릴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또한  우리 자신들이 가진 부족하고 나쁘다고 생각해 왔던 모습들도 긍정적으로 재해석해 내기를 조언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나쁜 점들을 좋은 점으로 다시 재해석하고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할 때에야 우리 삶은 위대한 전성기를 맞는다.(The great epochs of our life are the occasions when we gain the courage to rebaptize our evil qualities as our best qualities.)



내가 성미가 급하다면, 추진력 있는 사업가 기질로, 내가 게으르다면 천천히 내 속도대로 갈 수 있는 용기 있고 여유 있는 사람으로, 내가 느리다면 차분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으로, 내가 의심이 많다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가는 유비무환의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재해석하고 나를 다시 정의하고 나를 사랑하자는 것이다.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긴 모습 그대로, 타고난 성향, 성격까지도 다 진심으로 끌어안고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것이다. 



니체가 가르쳐 주는 기쁜 삶의 비결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저서를 통해, 진정 기쁘게 힘 있게 살아갈 수 있기 위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정신(영혼)의 변화 단계를 거칠 것을 제안한다. 


낙타처럼 인내하라


등에 무거운 짐을 잔뜩 싣고, 이글거리는 태양이 내리쬐는 끝없는 사막길을 걷는 낙타를 상상해 보라. 때론 우리는 힘든 여정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낙타의 인내심이 필요할 때가 있다. 삶의 어려움 앞에서 쉽게 포기하거나 손을 놓지 말고, 끝까지 견디며 인내하며 묵묵히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니체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낙타의 정신에 머물지 말고 사자의 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사자처럼 자유를 쟁취하라


우리의 정신은 사자처럼 용맹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강한 사자'로 다시 쓰고, 나의 정신을 지배하고 억압하려는 어떤 것에도 과감히 대항하여 맞서 싸우고, 나의 자유를 되찾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보편적 외부적 기준을 내 안에서 걷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걷어 내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나만의 기준 나만의 내면세계, 나의 가치를 창조해 가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사자의 정신으로 될 수 없는 일이며, 여기서 부터는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나의 세상을 만들어라


어린아이의 정신을 다시 입는다는 것은, 과거도 잊고, 미래도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여 과감하고 자유롭게 나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나의 타고난 창조성을 발휘하여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놀이를 하고, 내가 짓고 싶은 세상을 당당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에게 맞는 새로운 기준과 소신을 세워간다는 것이다. 


마침내, 내 영혼이 어린아이 같은 상태가 될 때에야 나는 남의 기준과 억압에 짓눌리지 않고, 과거 실수의 죄책감과 미래의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는, 내게 주어진 삶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사람,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성공적으로 나의 길, 나의 세계를 세워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복이 없었던 사람 니체. 그런 니체가 자신의 박복한 삶을 행복한 삶, 기쁜 삶으로 재해석해 낸 것을 우리는 생생히 목격하였다. 니체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찾아낸 '생의 기쁨'을, 모든 인간이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기록하여 책으로 남기는데 남은 생을 다 바치고 떠나갔다. 박복 그 자체인 니체도 누린 기쁜 삶을, 못 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낙타처럼 삶의 고통과 결핍감을 인내하고, 사자처럼 내면을 억압하는 모든 외부 기준과 싸워 자유를 쟁취하고, 어린아이처럼 지금 이 순간 내 삶에 집중하며 나의 행복을 창조해 나가면 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y (by WikiImage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