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는 아픔을 극복했다 6
시골 문화에 적응 못한 젊은 꼰대 선생
32세에 책 한 권을 출간하며, "중요한 철학 문제들을 다 풀었다."라고 외치고 케임브리지 대학 철학 교수직을 박차고 시골로 떠난 한 철학자. 그는 바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언어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1889-1951)이다. 그리고 그가 32세에 출간한 그 책이 바로, 생전에 펴낸 유일한 책이자, 비트겐 슈타인의 첫 번째 주요 저서인 <논리-철학 논고>다.
그의 <논리-철학 논고>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The world is the totality of facts, not of things.)
그는 이 책을 통해, 세계를 이루는 사실들은 논리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철학의 목적은 이 세상의 논리적 형태를 더 잘 그려내기 위해 언어를 깎아 다듬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 주장을 '그림 이론 (Picture Theory of Lanugage)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가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철학자들이 말을 아끼고 조심스럽게 가치가 있는 것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That wereof we cannot speak, thereof we must remain silent.)
언어는 현실을 묘사해 보여주는 그림 같은 것이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그림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기술하는 언어만이 진정한 언어이며, 그 외의 언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철학적 탐구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언어의 유일한 기능을 대상을 지시하고 서술하는 것으로, 어떤 단어/문장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동일시되는 개념으로만 보는, 언어를 철학의 절대적인 도구로만 보는 그의 언어관이 깔려있었다.
<논리-철학 논고>를 완성하고, 그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중요한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논의를 완성함으로써, 철학 작업을 완성했다고 확신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의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그뿐 아니라, 독일 철강 사업가 집안의 아들로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것도 자기 몫을 형제자매들에게 나눠주고 과감히 손을 털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소박한 삶을 살며, 자유로운 사유와 글쓰기에 전념하는 여생을 꿈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시골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머물렀던 6년간의 시간은 결코 평화롭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시골 아이들과, 그 부모들, 마을 사람들과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어 사용도 생각도 너무 달라 서로 동문서답만 하는 것 같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시골 문화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도저히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그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복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 자신이 품고 있던 자신만만했던 신념들을 찬찬히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내가 잘못 생각했네
다행히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일에 머뭇거림이 없는 솔직하고 용감한 성격이었다. 그런 성정 덕분에 비트겐슈타인은 결국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간파해낸다. 자신이 가진 언어관과 세계관에 큰 구멍이 있었음을 발견하고, 자신이 언어를 그림이라고 제한했던 그 언어관이 상당히 잘못된 것임을 확실히 깨닫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나머지 평생을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설명하는데 바쳤고, 그의 사후에 출간된 저서, <철학적 탐구>는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실수를 딛고 일어난 성장과 변화를 담고 있다.
비트겐 슈타인이 남긴 아래의 기록들을 보면 그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한 단어의 의미는 사용이 결정한다. (In most cases, the meaning of a word is its use.)
언어가 고정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상황, 즉 쓰임새가 언어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비트겐슈타엔에게 언어에 대한 의미가, 세상을 반영하는 고착된 것에서, 우리의 삶, 실생활과 함께 움직이는 유동적인 것으로 달라진 것이다. 그의 언어관에 변화와 성장이 일어난 것이다. 더 이상 그에게 언어는 세계의 논리 형태 지도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노는 '게임' 속에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칙 활용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같은 언어권이라도, 지역에 따라, 집단 성향에 따라 단어에 대한 의미가 다르게 활용되고, 다른 관습 다른 규칙에 따라 사용될 수 있으며,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이 머물렀던 시골 마을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그러한 문화의 벽이 있었음을, 그러한 문화의 벽을 무시하고 자신이 시골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었던 것이었음을 - 마치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온 선교사가 오지의 원주민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 결국 자신이 문화 부적응자로 그 문화권에서 따돌리고 추방당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딜 가든지, 그곳에 적응하려면 그곳에서 사용되는 언어 규칙을 이해하고 따라야 하는 것임을 철저히 느꼈다.
한 위대한 사람의 성장이 세계를 성장시키고 나를 성장시킨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뿌연 김이 서린 거울 같고, 안개에 휩싸인 숲 속 같다. 제 아무리 잘난 천재 학자, 아쉬울 거 하나 없는 부잣집 아들이라고 해도 삶의 지혜나 진리 같은 것들을 속시원히 꿰뚫어 볼 재간은 없다. 이 세상이 그렇게 다 가진 사람에게 만만하도록 디자인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목이 뻣뻣하고 콧대가 높은 잘난 사람들이 걸려들만한 보이지 않는 어리석음의 덫이 더 수두룩할지 모른다.
세상을 이루는 지혜로운 법칙 같은 것들은 드러날 듯 말 듯 숨어 있다가, 아주 몸을 낮추고 겸허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만 제 모습을 조금씩 보여주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늘 승승장구만 거듭했던 천재 학자가, 만만히 여겨도 한참 만만히 여겼을 당치도 않은 곳에서 맛본 최초이자 최악의 실패감을 느낀 그 순간. 꿈꾸던 소박한 시골 라이프에서 퇴장당했던 그 비참한 순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혜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는 군말 없이 자기 눈에 보이는 진실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과거 주장이 실수였다고 과감히 인정했다. 그것을 책임지고 끝까지 설명하겠노라 자신의 남은 생애를 걸고 약속했다.
그의 이러한 성장과 태세 전환은 20세기 철학과 언어학이 논리적 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에서 행동주의 (Behaviourism), 실용주의(Pragmatism)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끼쳤다. '관념'의 탑을 쌓아가는 소수의 학자들에게만 의미 있는 현학적, 형이상학적 언어가 아닌, 실생활에서의 '사용'으로 언어의 가치를 끌어 온 것이다. 관념 속에 죽은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실용적 의미가 없는- 언어가 아닌, 실제 삶 속에서 맹렬히 살아 변화를 거듭하는 언어의 가치를 본 것이며, 언어의 본질 그대로 어떤 억압이나 규제나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생성 변화 소멸할 수 있도록 언어의 가치와 자유를 지켜낸 것이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내가 내 방식 대로의 표현에 가치를 두고, 내 나름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관의 변화가 없었더라면, 정확한 의미대로 사용하는지 아닌지, 기존의 관념과 맥락이 맞는지 아닌지, 얼마나 많은 잣대가 있을까. 맞춤법을 따지는 것만도 피곤한데, 단어 의미의 본질적 의미까지 누군가 정한 기준에 맞추어 내야 한다면, 그것을 정확히 배워낸 정통 학파 학자들만 글을 써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가끔은 형식을 부수어 가며, 기존 관습, 전통을 깨뜨려 가며, 마음껏 내 속이 시원한 대로, 내 느낌대로 표현하고, 신조어도 마음껏 만들어 볼 수 있는 자유로운 언어 사용이 허락되는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나는 가슴 벅차게 기쁘다. 이러한 기쁜 자유의 바탕이 되어준 비트겐슈타인의 성찰과 반성과 태세 전환이, 아픔과 실수를 딛고 만든 성장이 나는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