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는 아픔을 극복했다 7
불안정한 존재
1905년생 사르트르는 아버지의 기억이 없었다.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가 인도차이나 전쟁 후 열병으로 사르트르의 나이 2 살에 사망하신 것이다. 따라야 할 롤모델, 인정을 갈구할 대상이 없는 상태의 사르트르의 결핍 속으로 외할아버지 슈바이처가 들어왔다. 사르트르의 어머니가 바로 그 유명한 노벨평화상 수상자 슈바이처의 딸이었던 것이다. 사르트르는 슈바이처의 슬하에서 자라나며, 할아버지의 깊은 학문적 교양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쓰기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다행히 어머니도 계시고 인격 훌륭한 할아버지도 계셨지만, 사르트르의 인생은 녹록지 않다. 그는 3살 때 한쪽 눈을 잃고, 평생 근시와 사시에 시달리며,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이겨내야만 했다. 그의 청소년기는 정말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간이었다. 사르트르의 나이 12 살에, 그의 어머니가 재혼을 했으므로, 의붓아버지를 따라 외갓집을 떠나 다른 도시로 이사가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해야 했다. 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돈을 훔치고, 할아버지와 의절하는 일까지 생기고, 연모하던 소녀에게 거절당하며 자신의 추한 외모를 자각하기 시작하며 자신에게 없는 결핍과 부족함의 잔인한 습격을 받는다. 사르트르를 걱정한 가족들은 그를 다시 외갓집에 보내,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학습을 이어가게 했다고 한다. 그는 공부와 글쓰기에 전념하고, 어린 나이에 단편 소설 <병든 사람의 천사>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1924년, 사르트르의 나이 19세에 고등 사범 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기에 이르고, 그곳에 만난 레이몽 아롱 (프랑스 작가)과 메를로 퐁티(프랑스 철학자)와 가까이 지내며 교류했다고 한다. 1929년 철학 교수 시험에 수석 합격했고, 같은 시험에서 차석 합격을 한 보부아르를 그때 만나게 된다. 사르트르는 그해 보부아르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고, 평생의 반려자가 된 그녀와 부부의 인연을 시작한다.
그는 사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하여 1년 반 가량을 복무하게 되는데, 이때 독일군 포로에게 잡혔다가 극적으로 풀려나 살아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31년부터 파리 근교의 고등학교에 재직, 교사 생활을 하며,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고, 소설 - <벽>(1936), <구토>(1938) -과 철학서 - <존재와 무>(1943)를 발표하여 문학가로서도 철학자로서도 입지를 굳히게 된다. 또한 그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알베르 카뮈와 교류하기도 했고, 1945 년 <현대> 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이때쯤부터 그는 많이 알려진 인플루언서가 되어 미국에도 초청받아 각 주를 다니며 강연 활동을 하기도 했다.
사르트르 철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
사르트르는 '실존'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하였다. 사르트르의 실존 철학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 인간이라는 본질을 만든 후 실존하게 한 것이 아니라 -, 인간은 그냥 세상에 내팽개쳐진 존재라는 무신론적 전제 위에 세워진 개념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이 이보다 더 완벽한 존재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그의 존재의 고민과 아픔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을 알고 싶어 하지만 평생 스스로의 본질을 알 수 없어 괴롭고, 삶의 부조리에 휘둘리며 고통받다 가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무목적성을 가진 인간의 존재 의미에서 희망을 보았다. 특정한 목적이 없기에, '본질'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이렇게 살아 이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정해진 방향이 없기에 인간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스스로 원하는 대로 정의하는 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늘 새롭게 자신을 극복하고 정체성을 새롭게 쓸 수 있는 존재,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존재'란 의자나 책상처럼 역할이 정해진 - 본질이 미리 정해져 있는 - 자유가 없는 존재들에게 붙이는 이름이므로, 인간은 '존재'가 아닌 '무'라고 이름 붙였다. 이 '무'는 '실존'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금 어떤 일,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비치건, 언제나 자신이 원하면 그 자리를 버리고 다른 모습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의미다. 스스로의 모습을 극복하고 뛰어넘을 자유가 있기에 '존재'가 아닌 '실존'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르트르에게 '실존'의 의미는 스스로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자신을 이기고 나아가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는 힘이 있는 존재였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한 발 떨어져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대자(for-self)'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했다.
사르트르는 드디어 버림받고 내팽개쳐진 것 같은 불운한 자신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한쪽 눈을 못쓰면 어떤가, 그래도 멋진 글을 써내는 최고의 천재 작가가 되었다. 못생기면 어떤가, 사상이 울퉁불퉁한 멋진 남자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아름답게 교류하는 방법을 찾았다. 아버지가 없으면 어떤가, 나는 내 삶을 그래도 멋지게 일구어 냈다.
사르트르는 불행한 인간들이, 겨우 행복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이 자유를 너무나 중요하게 여겼다. 스스로를 극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그것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모든 종류의 사회 체계 - 봉건주의, 자본주의 -와 억압에 반대했다. 사르트르에게 마르크스주의야 말로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는 휴머니즘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래서 1950년대 북한이나, 1960년대 북베트남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사르트르의 삶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사르트르는 자신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길을 찾은 사람이다. 능동적인 삶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쓸 수 있었기에, 아빠 없이 큰, 못생긴 사시 사르트르가 아니라,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사상가, 문학가, 천재 작가 사르트르를 탄생시켰다. 여자에게 거절 당해 상처 입은 여성 혐오자 사르트르가 되지 않고, 여성을 사랑하고 삶의 주체로서의 여성의 자유와 인권까지 끌어안은 휴머니스트, 보부아르와 합리적이고 자유롭고 행복한 반려자 관계를 위해 계약 결혼을 시도한 최초의 관계 실험가, 사르트르가 되었다.
무신론, 유신론, 각자가 가진 사상에 상관없이,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며, 인간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우고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을 성찰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힘과, 그럴 자유가 있는 존재라는 것만큼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결핍과 부족함에 머물러 정체되지 말아야 한다. 일어서서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개인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고 다시 쓰며 나아가야 한다.
Life is C between B and D.
인생은 삶(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처럼, 모든 인간에겐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시간이 있고, 그 사이를 이루는 인간의 삶은 자유로운 선택의 연속이다. 물론 자유를 억압하는 각종 장애물이 있을 수 있고, 모든 자유로운 선택은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인생이지만, 극복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데 삶의 의미를 두고 나가간다면 '실존적 의미'가 충만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luigicros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