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기쁜 삶으로 가는 길
무엇이 부족한가
나의 갈증의 원인을 오래도록 찾아 헤맸다. 마치 나의 탄생과 함께 기억에도 없는 순간부터 시작된 듯한 이 갈증은 내내 나를 감정적으로 괴롭혀 왔다.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내 감정이 그리는 발자취를 따라가며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예민, 소유욕, 질투, 결핍감, 자기혐오, 완벽주의,... 문화와 학문 속에서 내 마음과 닮아 보이는 언어들을 차곡차곡 주워 도표를 만들고, 내 감정들이 그리는 점들을 이어보았다. 그리고 내 삶의 선택들이 그려온 궤적과 비교해 보았다. 모든 것이 한 곳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치심(shame)'이었다.
나는 남존여비사상이 심한 가부장 문화 안에서 자라며, 내가 여자라는 것에 대해 수치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도록 그 근원적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해, 문화적으로 혼용되는 단어인 '수치'가 내가 가진 정서적 고통의 이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 이것저것 주워들은 언어들을 여기저기 파헤쳐 가며 산만하게 고민을 해온 것이었다.
여자로 태어나 느낀 수치심
아들 - 내 남동생 - 이 태어났을 때 사람들의 얼굴에 어린 환심, 그 환한 만족감을 보고 나도 그것을 원하기 시작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남의 감정을 열망하는 일은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어린 마음은 알지 못했고, 어른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열망은 어릴 때는 여자 옷을 입지 않고 동생 옷을 입고 외출하려는 심리로 작용했고, 커서는 공대에 진학해서 남자들의 대열에 합류하려 애쓰고 가사 일이나 외모를 꾸미는 일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도록 작용했다. 남자처럼 힘이 세고 키가 크고 싶은 욕구에 내내 사로잡혀 있었다.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놀아야 할 시기에, 남자아이들이 열광하는 무술과 스포츠를 배우려고 애를 썼고, 한참 꾸미고 멋부릴 나이에, 남자들의 문화와 관심사를 우선으로 두고, 내면의 여성적 욕구를 억누르는 습관을 익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 아이 밥 챙겨 주는 일조차 버거운 현실 앞에서 나는 혼란의 눈물을 쏟아야 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의 기준도 남성성의 기준도 흡족하게 만족시키지 못하는 나. 인정받는 살림의 달인도 못되고, 존경받는 사회적 위치에 이르지도 못한 나. 내 안을 번갈아 가며 휘젓는 이 두 가지 욕구, 상충하는 기준들이 내 안에 몹시도 복잡하고 어지러운 '수치심의 거미줄' - 브린 브라운 박사의 <수치심 권하는 사회>에 나오는 표현 - 을 쳤다.
공감의 결핍
여성으로서 느끼는 나의 수치심, 제대로 된 여성이 되지 못한 수치심, 제대로 남성화되지도 못한 수치심, 이 복잡한 수치심 덩어리 자체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나는 내내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부장제 문화 안에서 내가 느끼는 수치심에 대해, 그 문화 안에 완벽히 적응하고 순응한 여자들은 네가 유별나고 예민한 것이라고, 혹은 자신의 팔자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철없는 태도라고 공격했다. 가부장제 문화의 억압을 모르고 자란 여자들은, 그런 상황을 겪어 보지 않아서 공감이 가지 않고,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왜 그렇게 행동해? 모두가 의아해하는 그 얼굴을 보는 일이 나는 몹시도 아팠고, 어느 쪽 기준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가 없어 외로웠다.
물론 나도 그들을 공감할 수 없었다. 남자도 여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도 여자도 나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으므로, 그들은 나에게 기준을 제시하는 판단자일 뿐, 그들의 삶을 이해해 볼 여유 같은 것이 나에게 없었다. 공감받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삶이 나를 몹시 위축시켰다.
내가 격통에 이르기까지 앓아 왔던 그 결핍은 바로 '공감의 결핍'이었던 것이다. 타인의 공감을 받지 못하는 만큼,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와 주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마음이 몹시 컸고, 상대의 감정이 내가 원하는 만큼 동조적이고 호의적이지 않을 때, 나는 몹시 실망하고 상처받았다. 공감에 대한 극심한 결핍감은, 독점욕에 가까운 소유욕과 질투로 발전했다. 이 소유욕과 질투 또한 사람에게 쉽게 공감받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질투나 탐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초월한 사람으로 생각들을 한다. 물건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나를 보며 모두들 신기해한다. 사실은 물질에 관심을 둘 마음의 여유 자체가 없어, 물건에 대한 탐심이나 소유욕이 생길 일이 없는 것이다. 나 조차도 나는 욕심이나 질투가 없는 사람이야 라고 내내 속일 수 있었을 만큼, 나는 나를 정확히 직시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제 와서 뒤늦게 훤히 보게 된 나의 내면의 썩은 실체를 폭로하자면, 나의 모든 초점은 공감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소유한(?) 공감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즉 관계만이 질투심과 탐심을 몹시도 끌어낸다. 나를 이해하고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친구가 생길 때, 나는 그 친구를 독점하고 싶은 것이다. 내 사람을 공유하기 싫다. 나 아닌 타인과 내 사람이 공감과 이해를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싫다. 고통스럽다. 또한 나는 내가 속한 집단 안에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쉽게 끄는 존재가 미웠다. 내가 바라는 관계적 이상, 사람들의 환심을 쉽게 끄는 매력을 소유한 것이 나의 어릴 때부터 한 맺힌 결핍감을 몹시도 자극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부장 문화가 센 집안의 첫딸로서 어릴 때 느낀 첫 감정을 공감받지 못하는 걸로 시작해, 이젠 그 결핍이 점점 커지고 불어나, 공감 부족 상태가 한계에 달한 가운데, 내 내면의 수치심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욱 사람의 공감을 받을 수 없는 모양새가 되어가고, 비밀스러운 수치심의 농도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나는 늘 비슷한 패턴으로 망가지는 관계들이 너무 피곤해졌고, 그때부터 이미 내 삶의 추락은 예고된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미국에 와서 상담사까지 찾아가게 된 상황은, 익숙한 사람들을 모두 잃고 새로운 환경 안에서 내 인생에 공감이 정말 말 그대로 씨가 마르게 된 정서적 응급 상황이었다. 상담사를 만난 것은 달리 말하자면 내가 타인의 공감을 돈 주고 산 일이었던 것이다. 후에 나는 상담사를 찾아간 일에 대해, 내가 평생 나 자신에게 해 준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상담사와의 상담을 통해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내가 나를 공감해 주는 방법이었다. 조금씩 내가 나 스스로를 공감하고 돌볼 수 있게 된 나는 점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결핍의 힘을 공감 능력으로 바꾸기
결핍은 채우려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내 안의 그 힘이 끊임없이 공감을 갈구하며, 나를 공감 바라기로 만들어 갔다. 그것이 소유욕과 질투가 되어 나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내가 맺는 타인과의 관계들을 활활 태우고 파괴시켜왔다. 혼자 비밀스럽게 내면에 수치심을 키우고 있는 한, 결핍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채우고자 하는 이 힘도 잠재울 수 없다.
결핍의 공감 욕구에 휘둘려 사는 것은 마치 기다란 숟가락으로 밥을 먹으려는 일 같다. 이 기다란 숟가락으로 밥을 먹으려 하면 밥을 다 흘리고 제대로 먹을 수 없다. 결핍이 발휘하는 욕구대로 남의 공감을 끌어와 내가 먹으려 하면 할수록 공감은 더욱 당황해 펄쩍 뛰어 달아 난다. 더 목마르고 더 의존적이 되고, 내 삶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서로가 숟가락의 방향을 바꾸어, 서로를 먹이면 쉽게 배불리 먹을 수 있다. 믿고 떠먹여 줄 수 있는 서로를 찾아 자신이 가진 결핍의 힘, 공감의 욕구를, 결핍으로 고통받는 타인을 공감하는 데 쏟아부어야 한다.
내 결핍의 힘을 전환시켜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나의 수치심 안에 매몰되지 않고 벗어나는 일이면서,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재창조하는 일이면서, 추락하던 내 삶을 끌어올려 상승시키는 일이다. 나의 결핍 가득한 인생을 멋지게 극복하는 클라이맥스를 갖춘 아름다운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서로 밥 먹여 줄 사람을 찾자. 긴 숟가락의 같은 고통을 가진, 우리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찾자. 부족한 서로를 품고, 내 안의 결핍 가득한 공간을 리모델링해서 타인이 쉬어갈 수 있는 따뜻한 온돌방을 만들어 내 주자. 서로서로를 토닥이고 마음으로 품어주며, 결핍을 공감으로 바꾸는 인생을 우리 함께 손잡고 걸어 나가자. 우리 서로가 서로를 먹이고 돌봐주는 치유제가 되어주자.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gera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