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용기를 부른다

자유롭고 기쁜 삶으로 가는 길

by 하트온

할머니의 수치심


나는 할머니에게서 여자는 죄가 많아 인생길에 무수히 많은 벌을 받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 남자와 맞먹으려 해서는 안 되는 있는 듯 없는 듯 말없이 조용히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말을 내내 들으며 자랐고, 오랫동안 여자인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내가 겪은 아픔이 표면적으로는 남존여비사상 가득한 가부장 문화가 주는 고통 같았지만, 상처를 내는 실체는 지독한 수치심이었다는 것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그 누구보다 수치심의 고통을 앓았던 사람은 할머니였던 것이다. 할머니는 20세기 초반의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여자의 삶에 순응하고 충실하느라 글을 배우지 못했다. 할머니는 자신이 알아야 하는 글자와 숫자를 수첩에 적어 놓고, 그것을 요즘 사람들의 스마트폰처럼 늘 품에 끼고 다니셨다. 가족 누구도 할머니의 문맹에 대해 탓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할머니는 늘 그것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으셨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글을 아주 잘 아는 양반이었으며,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훈장 어른으로서 글을 가르치는 능력이 탁월했으나, 딸들에게만큼은 글공부를 하지 않을 자유를 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매들과 모여 바느질하고 음식 배우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글을 배우지 않기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말을 자꾸 하셨다.


할머니는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선생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학생이 되는 것이 두려워 배움을 기피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항상 우위에서 호령하고 심판하는 자리에 있고 싶어 하셨다. 여자는 남자와 한 상에서 밥을 먹어서도 안되고, 남자 옷과 자신의 옷을 함께 빨래해도 안 되는 존재지만, 여자끼리의 세계에서 할머니는 스스로를 제일 꼭대기에 있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마을에서 가장 바느질을 잘하고, 가장 음식을 맛있게 하는 탁월한 여자였음을 우리에게 거듭 일깨워주었다. 자신이 얼마나 다른 여자들과 비교도 안되게 뛰어나게 바람직한 존재였었는지, 요즘 젊은 여자들이 할머니의 기준으로 볼 때, 얼마나 교양 없고, 솜씨 없는 모자란 것들 투성인지 매일 증명해야 하셨다. 앞집 아줌마도, 뒷집 아줌마도 할머니의 신랄한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 여자는 '안경잡이'라서 탈락, 저 여자는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서 탈락. 엄마와 숙모들도 할머니의 심판을 비켜갈 수 없었다. 며느리 세 명 중 한 명이 없는 자리는 곧 자리에 없는 며느리 험담하는 날이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할머니는 도시에 오자마자 쪽진 전통식 머리를 과감히 뽀글 파마머리로 변신시켰고, 외출을 할 때면, 최신 유행하는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나가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그런 노력은 도시 것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싶지 않은 할머니의 자존심 지키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에게 있어, 자신이 순응한 가부장 문화의 전통은 자신의 정체성,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핵심 가치였을 것이다. 가치가 급변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욱 옛 가치를 강조하고 항변해야 했을 것이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세운 기준을 누누이 되새겨 읊어야 했을 것이다. 그녀의 삶을 옛날 못 배운 시골 여자로 만들어 버린, 위협적인 현대적 기준 앞에서, 할머니는 수치심의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요즘 여자들의 가치관 변화에 계속 화를 내야만 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저런 '천한 상놈 같은 삶'을 살면 안 된다고 자꾸 세뇌시켜야 했을 것이다.


손녀인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가를 알 수도 없고, 아파하는 것을 배려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본인 자신의 수치심에 매몰되어 당신의 감정을 감당하기도 벅차, 내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말할 수도 없었다. 말을 하고 표현을 할수록, 나는 할머니의 기준에서 멀어지는 못 배워먹은 인간이 될 뿐이라는 것을 선명히 깨닫고 나는 입을 닫아 버렸던 것 같다.



다 수치심이었다


깨닫고 보니, 아버지의 마음에 가득했던 것도, 어머니의 내면을 잠식하고 가두고 있었던 것도 다 지독한 수치심이었다. 아버지의 수치심은 술과 분노로 쉽게 전환되었고, 어머니의 수치심은 자녀를 공감할 수 없는 공감 능력의 부재로 나타났다. 나와 동생은 수치심이 휘두르는 몹시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치심은 아래로 흘러, 가족 친척 모두가 서로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을 괴롭히던 수치심들을 하나하나 꺼내 나열해 보자면, 시골 출신이라 도시 문화가 새로운 수치심,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라는 수치심, 급변하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는 수치심, 원하는 만큼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수치심, 시대를 영리하게 파악하고 제대로 준비한 사람이 없는 수치심, 충분히 지원해주는 부모가 없는 수치심,...


어른들의 수치심은, 심한 갈증과 조급증이 되어 아이들을 누르고 닦달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혼란스러운 기준을 들이대며, 자신들의 수치심을 자랑스러움으로 충족시켜 달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있었다. 아이들이 조금만 실수하거나 실패해도 수치스럽다고 과잉반응으로 아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인생길에 한치라도 삐끗하면 뒤돌아가 기댈 언덕이 없을 것 같다는 절박감 때문에 아이들은 점점 완벽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음을 옥좨는 완벽주의가 영리한 아이들을 오히려 무능하고 두려움 많은 존재로 몰아가고 있었다.



수치심에서 회복하는 길


수치심은 모든 것을 숨기기 시작한다. 어디 가서도 부모에 대해 나 자신의 깊은 내면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약점이 될 만한 것은 몸에 난 점 하나도 노출시키지 않는다. 그럴수록, 그 모든 것은 나만의 책임이 되고, 나만의 문제가 된다. 그럴수록, 너무 무겁고 힘들고 비참해진다. 내가 수치스러워하는 그 모든 것들이 나 자신으로 둔갑해 버리고, 내 삶은 비천한 수치심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수치심을 뚫고 나와야 한다. 수치심을 뚫고 나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다. 내가 나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나를 향한 따뜻한 마음, 그리고 나의 수치심을 있는 그대로 타인에게 알리고 연결하는 용기. <나는 불완전한 나를 사랑한다 (The Gift of Imperfection)> 의 저자 브린 브라운 (Brene Brown) 박사는, 그녀의 저서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데서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낀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 보이고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브린 브라운 박사의 이 말은 추상적인 가설이 아니라, 한 연구원이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하고 연구한 후 내린 통찰력 있는 결론을 자신 있게 발표하는 과학적 데이터인 것이다.


모두가 수치심을 느낀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모두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고 살아가는 것이 두렵다. 그런 두렵고 부끄러운 사람들이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를 따뜻하게 공감하고 지지하는 연결을 이루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수치심을 이기고 살아낼 수 있다.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드러내며 다가가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런 용기는 그냥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스스로에 대한 따뜻한 마음만이 용기를 잉태할 수 있다. 스스를 너그럽게 품어주는 수용의 마음만이 타인의 수치심도 감싸 안아주고 공감해 줄 수 있다.


브린 브라운 박사는 그녀의 여러 저서들을 통해 수없이 강조한다.


수치심은 은폐, 침묵, 비난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자라난다. 반면, 공감은 수치심의 해독제다.


어떤 일에 대해서도 나만의 부끄러운 무엇으로 숨겨두어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지 않아 별일 없을 것만 같은 수치심은 순식간에 몹시 거대한 무엇으로 자라나 우리의 내면을 깡그리 삼켜버리고 만다. 수치심은 우리의 모든 공감 능력과 연결 능력을 마비시키고, 비루하고 아픈 고립과 단절 속에 우리를 가두고 만다.


너무 늦기 전에 수치심을 걷어내기 시작해야 한다. 내 모습 이대로 괜찮다고 스스로를 믿어주고 감싸 주어야 한다. 같은 수치심의 고통을 겪는 타인을 찾아 용기 내서 다가가야 한다. 자신과 서로를 이해해주고 공감하는 연결된 삶을 시작해야 한다. 함께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대대로 수천 년 내려온 수치심의 독초를 마음에서 삶에서 깨끗이 걷어내고, 자유롭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azboo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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