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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g Apr 03. 2024

가즈오 이시구로의 <The Buried Giant>

사회적 고난과 집단적 망각 속에서 개인의 숭고함을 지키는 법에 대하여 

일본계 영국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2015년 소설 <The Buried Giant>는 2005년 <Never Let Me Go> 이후 10년 만에 발표한 장편이다. 두 장편 사이 2009년 단편 및 중편 모음집 <Nocturnes>를 발표했으니 호흡이 아주 긴 편은 아니다. 이시구로처럼 45세 이전에 작가로서 상업적 성공과 평단으로부터의 영예로운 상찬을 모두 획득한 '젊은 거장'이 노년에 발표하는 작품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대중적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동시대 젊은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부담감이 상당할 텐데, 놀랍게도 판타지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여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발표 당시 꽤 신선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다. 당시 사놓은 책을 9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읽었다. 사담이지만, 책장에 쌓여 있는 책들 중 아직 읽지 않은 책은 언젠가 읽힐 시기가 정해져 있다고 믿는 편이다. <Buried Giant>, 한국어로 번역된 책의 제목은 <파묻힌 거인>. 이 책을 2015년이 아닌 2024년에 읽어야 했던 이유를, 소설의 마지막 챕터를 읽은 후 어렴풋하게 (이 '어렴풋'이라는 개념은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알 수 있었다. 


소설은 로마 제국이 영국을 떠나고 앵글로-색슨 족이 영국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무렵, 즉 영국이라는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 평원의 한 마을에 살고 있던 노부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노부부 - 액슬(Axl)과 베트리스(Beatrice) - 는 금슬 좋은 부부처럼 보인다. 항상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힘든 순간에도 상대에게 먼저 어깨를 내어주는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오래전 부모를 떠나 다른 마을에 살고 있을 아들을 보러 가자는 베트리스의 제안에 함께 여정을 떠난다. 문제는 이 부부가 아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아들이 어디에 사는지, 언제 자신들을 떠났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한 듯 보인다. 심지어, 이들은 과거 부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액슬과 베트리스는 이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마을에 살던 사람 모두 비슷한 증상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과거의 기억에 대해서는 서로 공유하는 바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상태가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이 부부가 가난하지만 안온했던 마을을 뒤로 한채 거칠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면서, 이 부부의 기억을 희미하게 만든 이유가 서서히 밝혀지는 과정이 소설 전체에 걸쳐 가장 주요한 서스펜스적 요소로 기능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망각되었던 집단의 기억이 고통스럽게 되살아났을 때 개인은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이 소설이 던지는 가장 묵직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장르는 판타지다. 인물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숲 속에서 요정(pixie)이 나와 앞길을 훼방 높거나 개울가의 오거(ogre)가 갑자기 덮쳐올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세상이다. 위태위태한 노부부의 여정에는 그래서 여러 조력자가 등장한다. 색슨족의 마을에서 만난 전사 위스턴(Wistan)과 미스터리 한 상처를 안고 돌아와 색슨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노부부의 여정에 합류한 소년 에드윈(Edwin),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노부부와 색슨족 전사들에게 도움을 주는 늙은 브리튼족 기사 가웨인(Gawain)이 소설에 등장하는 또 다른 주요 인물들이다. 이들은 액슬과 베트리스의 여정에 때로는 동참하여 이들을 직접적으로 돕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각자 개별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 인물들이 갖는 개별적인 서사는 위에 언급한 '집단의 망각'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얽혀 들어가는데, 이들 사이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개인의 위기를 공동으로 극복하기도 한다. 


<이후 스포일러>


'가웨인'이라는 이름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영화 <그린 나이트>를 떠올렸다. 찾아보니 이 소설에 등장하는 늙은 기사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14세기 작품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에 등장하는 그 가웨인 경이 맞았다. 즉 <그린 나이트>와 <The Buried Giant>는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는 셈이다. 5세기에서 7세기경 색슨족이 본격적으로 영국 영토에 진입할 무렵, 영국에는 셀틱-브리튼족이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색슨족과 브리튼족 간 전쟁에서 가웨인은 아서왕의 조카로 브리튼족을 이끌며 수많은 색슨족을 죽음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색슨족의 전사 위스턴은 가웨인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다. 유년 시절 브리튼족 밑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수많은 모욕을 견디어낸 그는 이후 색슨족이 영국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큰 그림에서의 복수에는 성공하지만, 브리튼족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가족에 대한 기억만큼은 잊지 않고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큰 상처를 가진 색슨족의 위스턴과, 전쟁의 비극을 정당화시켜야 하는 가웨인, 그리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잊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액슬과 베트리스. 이들이 베트리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도착한 수도원에서 집단적 기억의 상실의 원인이 밝혀진다. 늙은 용 퀘리그(Querig)가 내뿜는 숨결이 주변에 안개를 만들어냈으며, 이 안갯속에 갇힌 이들은 어떤 특정한 기억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용을 지키는 기사가 바로 가웨인이었다. 


수도원의 수도승들의 배신과 쫓아오는 군인들을 피해 들어간 동굴 속에서 베트리스는 수많은 시체 유골을 밟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 액슬은 그것이 유골이 아니라고 말한다. 소설 속에서 명확하게 기술되지는 않지만, 액슬은 젊은 시절 아서왕, 가웨인 등과 함께 색슨족과의 전쟁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를 통해 색슨족의 언어까지 부분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베트리스와는 상이한 집단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즉, 베트리스가 상처 입은 소년 에드윈을 보살피며 자신의 상처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과 상반되게, 가웨인과 액슬은 상대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 완고한 태도를 보이며,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서도 괜찮다는 식으로, 그것이 지금보다 중요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한다. 에드윈과 베트리스가 잊어버린 기억을 찾으려는 쪽에 속한다면, 가웨인과 액슬은 그 기억을 영원히 묻어두려는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안갯속에 희미해진 기억이 뚜렷해질수록 몇 개의 개인적 비극이 소환된다. 액슬과 베트리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아들의 생사 여부가 그중 하나일 것이고, 위스턴과 에드윈이 박해받는 색슨족으로서 겪었던 개인적 고난이 다른 하나의 비극이다. 


드래건의 숨결이 만들어내는 안개처럼, 소설은 직접적으로 개별적 비극에 대해 묘사하지 않는다. 섬세한 문체로 서서히 실체가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의 비극과 갈등은 현대사에서 발견되는 집단적 비극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가즈오 이시구로가 여러 인터뷰에서 직접 언급한 바와 같이, 2차 세계대전과 원폭에 대한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논의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여담이지만(삼천포로 조금 빠진다면), 이시구로의 배경에 기대어 일본사회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볼 때 관동대지진 이후 현대 일본사회가 가지게 된 집단적 트라우마를 은유한다고 추측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관동 대지진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아사코>에서도 주요한 소재로 활용되는데, 이 영화와 소설 <The Buried Giant>가 개인의 기억을 통해 사회의 불안을 설명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웠다. 다시 2차 대전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이 전 세계적 전쟁은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비극을 유태인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만들었다. 이 민족은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고, 마침내 중동의 한 지역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며 또 다른 차원의 억압과 비극의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현재에도 진행 중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유혈 분쟁을 소설의 주제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보면, 한 집단이 가진 다른 집단에 대한 맹렬한 분노가 유전과도 같은 경로를 타고 흘러내려가 현재에도 비극을 계속 재생산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가즈오 이시구로가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다. 당신은 잊고 싶은가? 우리는 잊고 싶은가? 혹은 잊는 것이 옳은 것인가? 기억한다면, 그래서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위스턴은 같은 색슨족 전사 에드윈에게 필사적으로 부탁한다. 너의 비극을 잊지 말라고. 내가 다음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복수의 씨앗을 너에게 넘길 테니, 죽는 그날까지 브리튼족을 미워해달라고 위스턴은 아직 미성년자인 어린 소년에게 부탁한다. 아들을 잃어버린 기억을 망각한 노부부 액슬과 베트리스는 다른 방식으로 비극을 치유하려 노력한다. 강을 건너기 위해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순간도 견딜 수 없었던 이들은,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 속에서 상처를 재발견하지만, 굳건한 믿음으로 다시 한번 강을 건너려고 애쓴다. 이들이 성공적으로 함께 강을 건넜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이들이 최소한 위스턴과 같은 증오에 기반하여 상처를 타인에게 전이시키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가웨인이 위스턴의 손에 목숨을 잃음으로써 집단의 비극을 망각 속에 봉인하려 했던 시도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것이 해피엔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억이 돌아옴으로 인해 많은 이들은 새로운 고통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마을에서 액슬과 베트리스를 기다리고 있던 브리튼족도, 이 노부부를 환대했던 색슨족도, 혹은 비밀을 감추기 위해 애썼던 수도원의 수도승들까지도, 고통스러운 기억에 사로잡혀 현재를 더 힘들어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즈오 이시구로는 과거의 아픈 역사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리고 사회적 고난을 받아들인 개인이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두 가지 상반된 선택지를 제시한다. 독자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피해자라면 용서할 것인가. 혹은 증오를 간직할 것인가. 가해자라면 용서받을 것인가. 혹은 회피할 것인가. 이시구로의 전작 <Never Let Me Go>처럼 이 소설 역시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책을 덮은 후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어 원서로 읽었기 때문에 독해에 오류가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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