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환자였던 가족을 떠나보낸 과정에 대한 기록
<이 글은 2016년 8월 26일 작성된 글을 현재 상황에 맞게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8월 26일. 그 날은 2016년 여름의 다른 날들보다 유난히 더 덥게 느껴졌다. 낮 최고기온이 딱히 더 높은 것도 아니었다. 1994년 이후 가장 덥다는 2016년 8월의 아무 날에나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불쾌함이 몸을 휘감고 있었지만, 다른 날에 비해 조금 더 많이 걸었던 탓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찾아온 부정맥이 나에게도 대물림 되나 싶은 걱정이 잠시 들기도 하였지만, 그 날 내내 느꼈던 원인 모를 불안감은 나를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평소와 같이 점심시간에 책을 읽을 한적한 커피숍을 찾아 여기저기를 찾아다녔고, 한 번의 허탕 끝에 겨우 자리를 잡은 직후 서둘러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평소에 연락을 거의 하지 않는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폭염이 점점 심해지면서 밭일을 하시는 부모님이 걱정이 되어 최근 문자를 몇 번 보내긴 했지만, 그 날처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문자를 보낸 적은 없었다. 어머니의 답장에는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이모티콘이나 사진을 꼭 덧붙이던 평소의 명랑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불안감은 더 커져 갔고, 서둘러 전화를 했지만 어머니는 받지 않았다. 걱정이 아버지에게 향했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건만 기어코 고집을 부려 해가 떠 있을 때에도 밭일을 하시다가 쓰러지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칠 무렵, 어머니로부터 “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라고 시작하는 긴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사인은 일사병으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했다.
삼촌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었다. 앞날을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알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장례와 관련된 여러 행위들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날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어디로 가면 되나요?”, “몇 시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등의 문자를 보냈다. 당시 재직 중이던 직장에서 부모의 형제, 혹은 자매의 사망 시 사용할 수 있는 청원휴가 일수를 알아보고 팀장님 등 내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해 휴가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나와 성격이 다른 누나는 삼촌의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오열하며 감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우리 삼촌 불쌍해서 어떡하니”라는 누나의 문자에 나는 “그러게”라고 답했다. 나에게 감정은 ‘먼저 다가오는 대상’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위치와 역할을 규정하고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 나에게 먼저 다가오는 의무였다. 삼촌의 죽음을 마음껏 슬퍼할 권리를 지닌 이들이 있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삼촌의 죽음에 대한 나의 슬픔은 개인적으로 조용히 발현되어도 충분히 괜찮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삼촌의 죽음을 전해들은 후 처음 몇 시간은 나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당시 애인이었던 지금의 아내에게 문자를 보내 약간의 감정을 토해내기도 했다. 아내는 나의 가장 개인적인, 가장 가까운 타인이었으므로 그에게만큼은 안에 웅크리고 있던 감정을 용기내어 드러낼 수 있었다. 이 대화에서 나는 “슬픔은 나중에 몰려올 것”이므로 단지 “평소에 안부를 여쭈어보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당시부터 느꼈던 죄책감은 이후 장례를 치르는 과정 내내 점점 더 커져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대구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며칠 버틸 것들을 챙기기 위해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햇살이 지나치게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그해 여름의 태양을 원망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하철 역 앞에서 <빅이슈>를 파는 남자를 보았다. 울컥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5만원짜리 지폐를 한 장 쥐어준 후 “열 권을 팔기 위해 서 있어야 하는 시간 동안 어디 들어가셔서 잠시라도 쉬시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시 나에게는 그 정도의 인정이 자리잡을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 들러 간단히 짐을 꾸린 뒤 서울역으로 향했다. 평소 출퇴근시 애용하던 헤드폰은 넣지 않았다. 옷가지로 인해 가방의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귀에 무언가가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복잡해서였다. 7시 10분 차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내 좌석에는 외국인이 앉아 있었다. 티켓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웃으면서 움찔거렸다. 우리는 옆에 앉아 동대구역까지 함께 갔다. 제대로 씻지 않았는지 역한 땀냄새가 풍겼지만 나 역시 앞으로 며칠 동안 비슷한 처지에 놓일 것이므로 마음 속으로 탓하지조차 않았다. 작은 기내용 여행가방을 선반 위로 올리지 않은 채 다리 사이에 꼭 끼워놓고 가는 그 외국인의 긴장한 모습이 미국 유학을 처음 떠나던 당시의 나의 모습 같아 보였다. 마산까지 가는 그를 위해 창가 자리를 양보할 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에게 말 한마디 걸 힘조차 없었다. 동대구역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 정도였고, 공사중인 역사 앞에서 택시를 타고 계산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지하에 마련된 장례식장에는 자형이 막 도착해서 가족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고모 수녀님 두 분은 성당 옆 아파트, 즉 삼촌이 숨을 거둔 장소로 들어가 쉬고 계셨고 장례식장에는 서울 고모님 내외와 어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함양을 떠난 아버지는 옷가지를 챙기러 잠깐 다시 함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자형과 함께 삼촌의 영정 앞에 절을 하고 밥을 먹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삼촌이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일을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모든 일은 인과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가꾸어져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말로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다. 일사병으로 알려진 삼촌의 사인은 듣는 이를 황망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언어에 의해 결코 무(無)에서 툭 튀어나온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죽음 직후, 가족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삼촌과 15년을 함께 살아온 대구 고모님은 최근 파킨슨병이 심해져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삼촌을 떠나 근처의 노인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좋은 서비스를 받으며 새로운 삶에 대한 만족과 기대로 한껏 들떠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고모님은 15년 간 돌봐온 삼촌을 혼자 두었다는 죄책감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슬프게도 삼촌을 가장 처음 발견한 사람도 대구 고모님이었다. 장례절차 내내, 쓰러져 있는 삼촌을 본 충격과 그를 혼자 두어 이런 일을 자초했다는 죄책감이 결합되어 고모를 심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대구 고모님의 노인 아파트 이사를 제안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할머니를 닮은 대구 고모의 강한 성격은 유약한 성격의 삼촌의 병세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부모님의 판단은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최근 고모님의 몸 상태가 악화되어 당신 자신과 삼촌의 하루 세 끼를 챙겨 먹는 것조차 힘겨워진 상황도 아버지의 판단을 강화해주었다. 대신 부모님이 조금 더 자주 삼촌 혼자 사는 계산성당 옆 아파트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가장 최근 방문 시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집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비록 식사는 조금 부실해졌지만 삼촌의 표정은 훨씬 더 편해 보였다고 했다. 비록 이러한 기억이 작은 변명으로 기능할지라도, 고모와 삼촌의 분가를 제안한 아버지 역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임이 분명했다. 열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을 살갑게 챙기지 못한 당신의 무뚝뚝함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그가 동생을 위한다며 행했던 많은 일들을, 그다운 방식으로 자책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고, 바로 아래 남동생을 챙기지 못한 서울 고모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 모두 삼촌의 허망한 죽음을 필연으로 엮으며 자신의 탓을 마음에 새겨 넣고 있었다. 언어를 직조해 만들어낸 인과관계 위에 자신을 올려 놓음으로써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침묵 속에 가두어진 망자의 고난을 나누어 가지려 애쓰고 있었다.
삼촌은 2001년 할머니의 죽음 이후 조현병 증세가 심해진 뒤에도 새벽미사에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대구 남산동에서 동산동의 한 아파트로 이사온 후, 삼촌의 일과는 항상 새벽미사로 시작했다. 그에게는 밥을 챙겨먹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사망시간으로 추정되는 새벽 5시는 새벽미사를 보기 위해 준비할 시간이다. 발견 당시 삼촌은 외출복을 깔끔하게 입은 상태였고, 검안을 담당한 의사는 발코니 문을 열기 위해 그 방향으로 움직이던 중 거실에서 쓰러져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 무척 더웠던 2016년의 여름, 삼촌이 머물던 아파트의 발코니 문은 항상 굳게 닫혀져 있었다. 발코니에 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던 삼촌때문에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옆 집 목사의 항의 이후 그 문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미사 도중 일어나 움직이며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쏟아내어 미사를 집전하던 사제로부터 주의를 받은 이후 집 발코니에서만 소리를 질렀지만, 그 조차 옆 집 목사의 항의로 하지 못하게 되자 발코니 문까지 닫혀졌고, 아마 삼촌은 선풍기 한 대로 대구의 더위를 이겨내려고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집에는 에어컨이 있었다. 하지만 삼촌은 어찌된 이유인지지 에어컨 역시 여름 내내 한 번도 틀지 않았다. 평생 직업을 가지지 않고 부모님과 고모 등으로부터 생활비를 타서 쓰던 그에게 전기세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까.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나는 잘 모르겠다.
이유가 그 무엇이든, 삼촌의 죽음은 일사병으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변하지 않았다. 그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 이유를 굳이 찾아보자면, 혹은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 내자면, 예상 밖으로 더웠던 이 여름의 더위부터 미사 시간에 삼촌의 행동을 제지한 사제, 발코니 문을 닫게 한 목사, 삼촌을 24시간 관찰하지 못한 고모, 그 고모를 따로 나가 살게 한 아버지, 혹은 이 모든 과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나 자신까지, 그 누구에게라도 책임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잘잘못을 가리는 행위가 지금 우리에게, 혹은 망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가. 삼촌은 죽었고,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1년에 몇 번 되지 않은 자리에서조차 가족 간의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침묵을 벗 삼아 그림자가 되는 것을 자청했던 삼촌이, 정말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끊임없이 악마와 싸우며 자신을 지키려 했던” 그가 비로소 기나긴 사투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편한 잠을 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삼촌이 중얼거리며 내뱉은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많지 않다. 혹여 누군가 그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할지라도, 삼촌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그나마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소리’는 “나는 가톨릭 신앙인이다.” 라는 한 구절이었다. 그 구절을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어머니의 주장처럼 당신 안에서 점점 커져가는 다른 자아로부터 원래 자아를 지키기 위한 자기최면일 수도 있고, 정신적으로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삼촌이 종교에 대한 신념만큼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할 수 없다는 최후의 욕망이었을 수도 있다. 새벽 다섯 시, 그는 “가톨릭 신앙인”으로 사는 과정에서, 새벽 미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죽기 전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옷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혼자 힘으로 그 시간에 갈 수 있었던 곳은 대구 시내에 단 한 곳 밖에 없었다.
삼촌의 정신이 비교적 또렷하던 시절, 그러니까 삼촌에 대한 나의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는 사려 깊은 신학자였고 늙은 부모님을 돌보는 살뜰한 살림꾼이었으며, 열렬한 삼성 라이온스의 팬이었고 조카를 데리고 나가 서점에서 책을 사주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여주던 따뜻한 삼촌이었다. 매 방학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삼촌이 살고 있던 대구로 며칠 씩 휴가를 떠났는데, 그 때마다 나는 삼촌에게 물어볼 질문을 몇 가지 추려가곤 했다. 질문들은 대부분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 중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주일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쳐주던 교사들은 대부분 대학생이었고, 일반인보다 가톨릭 교리에 대해 조금 많이 아는 수준이었다. 주일학교에서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궁금증이 점점 쌓여가는 것은 당연했다. 1년에 두어 번, 삼촌과 나누는 긴 대화에서 가톨릭 교리와 관련된 많은 것을 배웠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 속에 쉽고도 명쾌한 설명이 담겨 있었다. 삼촌은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를 특히 좋아했다. 하루 종일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심부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친지가 모이는 명절은 가끔 번잡스럽고 정신 사나웠을 수 있지만, 우리 가족만이 와서 조용히 머무르는 여름과 겨울의 며칠은 삼촌에게도 꽤나 들뜰만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에게 아주 좋은 대화 상대였다. 그 누구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재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주로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면서 큰 목소리로 떠드는 삼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거실에서 빈둥거리며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기도 하다가 졸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로 영화나 정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될 무렵, 삼촌은 나와 누나를 서점으로 데리고 가서 여러 종류의 책을 선물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 삼촌이 사주었던 <삼국지> 한 질은 아직도 함양의 부모님 댁에 남아 있다. 키가 컸던 그는 종종 나를 들쳐 업고 휘휘 돌리며 장난을 치기도 했고, 술을 좋아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겨 쓴 맥주를 한 잔 받으며 함께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 나이가 훨씬 많은 형과 누나들, 그리고 늙은 아버지와 어울리는 와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치워야 할 것, 날라야 할 것, 대접해야 할 것, 배려해야 할 것을 신경쓰고 있었다. 그는 고스톱에도, 바둑에도, 술에도 능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에서 삼촌보다 한 수 위였던 데다가 활발히 사회생활을 하던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그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의 정신이 또렷하던 시절, 그는 좋은 아들이었고, 조용하지만 사려깊은 동생이었으며, 정다운 말 벗이자 충직한 집사였다.
나는 그가 여자를 사귀었는지, 혹은 결혼을 할 기회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어떤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혼자 몰래 읽으며 미소 짓던 장면은 지금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가 옆에서 “러브레터”라고 놀렸던 것도 기억이 난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두 번째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울컥한 마음에 대구로 내려갔다. 당시는 2002년이었고 할머니의 상을 치른 뒤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당시 삼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차례로 떠나 보내고 동산동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을 그는 차분하게 저녁식사를 차려주었고, 다음날 아침 나를 데리고 해인사에 갔다.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나는 니콘 FM2 카메라로 그를 찍었다. 그 사진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여자친구와 막 헤어지고 군 입대를 앞둔, 철없는 스무 살 무렵의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삼촌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때 삼촌은 마흔 살 즈음이었다. 지금의, 2023년의 내 나이와 비슷하다.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그와의 여행 이후 몇 달 뒤 나는 군대에 입대했고, 이후 삼촌의 자폐적 기질은 조현병으로 발현되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가족 중 일부는 삼촌이 사회활동을 하지 못한 이유인 이 병의 원인을 군대에서의 경험-폭행으로 인한 의가사제대-에서 찾는다. 반면 삼촌의 사회기피적 성향은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지나치게 강한 성향의 할머니와 누나들의 등쌀에 시달리며 유아기부터 발전해온 탓이라고 주장하는 가족도 있다. 하지만 서울의 명문대 중 하나인 서강대를 졸업할 정도로 정상적인 삶을 살던 삼촌이, 어느날 갑자기 자아를 상실하는 병에 걸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던 내가 사려 깊고 자신감 넘치던 삼촌의 모습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1993년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대구 고모님은 빠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에 정착했다. 유학 전에도 서로를 죽일 듯 사랑하며 미워했던 할머니와 고모는 중간에서 완충지대를 만들어주었던 유일한 중재자 할아버지의 부재 이후 더욱 극심한 갈등관계로 치달았다. 유약한 막내 아들이자 나이 어린 동생이었던 삼촌에게는 할머니를 모시는 것이 삶의 유일한 소명이었기에, 강하고 대찬 성격의 대구 고모와의 갈등을 피하지 않았던 것이 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었을까. 둘은 할머니의 죽음 이후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모의 막내 동생에 대한 사랑은 고모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고모의 사랑은 결코 관용적이지 않았다. 고모는 삼촌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그 지극한 사랑은 철저히 고모의 색으로 칠해져야 만족되는 것이었다. 삼촌은 약하고 여렸으며, 착하고 순했다. 할머니 밑에서 조용히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이제 고모 밑에서 또다른 수동적인 삶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 것이 힘들었는지 집 밖으로 자주 나갔고, 며칠 씩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연락이 잠시라도 닿지 않으면 고모는 극도로 불안해져 어머니와 서울 고모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머니는 무릎이 불편한 고모를 대신해 보따리를 하나 싸 들고 전국 여기저기를 다니며 삼촌을 찾아 다녔다. 그 와중에 나와 아버지와 어머니가 알지 못하는 두 사람 사이의 무수히 많은 갈등이 존재했을 것이다. 삼촌이 심리적으로 의지할 곳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를 혼내거나 닦달하지 않는 사람, 그를 항상 포근히 받아줄 수 있는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의 인생에서 만나 사랑을 하는 상대가 반드시 필요했다면, 그건 우리가 모르는 누구여야 했다. 더이상 이 가족 중 누군가가 그 역할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제대 이후 남은 학업과 유학 준비로 정신 없던 2006~7년 무렵의 어느 날, 마포의 집으로 삼촌이 갑자기 찾아 왔다. 집에는 부모님이 없었고 나와 누나만이 있었다. 과일을 내어오고 삼촌과 마주 앉았다. 삼촌은 대뜸 진화론에 대해 물었다. 표면적으로는 진화론이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지만, 결국 창조론에 반하는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나와 누나는 우리의 지식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정성껏 답했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그가 우리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는 우리의 말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우리의 대답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결국 한 시간여의 기묘한 ‘대화’는 어머니가 급하게 귀가한 후에야 마무리되었다. 다혈질인 누나는 대화 아닌 대화의 끝에서 기분이 상해 있었고, 나는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다. 내가 알고 기억하던 삼촌이 더이상 아니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유학을 떠났고, 더 이상 부모님으로부터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듣지 못 했다. 나는 미국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고, 내 얕은 그릇은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에게 많은 정성을 쏟을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몇 년 뒤 누나의 결혼식에서 삼촌을 다시 만났다. 결혼식이 끝나고 누나와 자형과 함께 마포의 부모님 집에서 뒤풀이를 하던 중 삼촌은 갑자기 일어나 “저 가겠습니다”하고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급하게 뒤쫓아 나갔고, 삼촌은 “잘 있거라” 한 마디만 남기고 어두운 서울의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이후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었다.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삼촌은 어느 순간 슬그머니 사라져 혼자 귀가하거나 다른 행선지로 떠났다. 그 곳에서 며칠씩 머물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대구 동산동 아파트로 돌아와 고모와 함께 지냈다. 증세가 심해지자 어머니는 이천에 있는 한 병원으로 삼촌으로 보내는데 성공했고, 수많은 난관 끝에 처방 받은 약을 삼촌 스스로 복용하게 하는 것에 성공했다. 나는 삼촌이 걱정되어 가끔 어머니와 통화할 때마다 삼촌의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의 대답은 항상 비슷했다. “그럭저럭 잘 지내시지 뭐,” 혹은 “요즘은 상태가 많이 좋아지셔서 얌전히 잘 계셔”와 같은. 나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삼촌은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비롯한 상주들은 가족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싶어했다. 하지만 한국의 장례문화는 그들의 바램을 흔쾌히 들어줄 정도로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계산성당의 연령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했다. 연령회장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모님이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의금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 정도였다. 사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쉽게 결정했던 것인데, 이후 수많은 연령회원들이 들이닥쳐 끊임없이 연도를 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이 곳의 장례 문화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삼촌이 했던 사회생활은 빈첸시오회와 신학대학원 정도였다. 두 곳에서 만난 인연들은 첫 날 저녁부터 장례미사까지 계속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들은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한참을 앉아 있다 돌아갔다.
삼촌도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했다면,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이 미래의 가난을 담보하는 저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삼촌이 젊었던 시절에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항상 개인의 ‘흠’ 안에서 발견되었을 뿐 그것이 개인적인 신념에 의한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는다는 행위가 한국 사회에서 오랜 기간 선호되어온 이유로, 자신의 유전적 형질을 보존하고자 하는 생물학적 본능 외에도 단기간 급격한 경제 부흥기에 투자가치가 높은 ‘인적 자산’의 규모를 불리는 행위에 대한 경제적 타당성, 그리고 뒤틀린 유교문화 내에서 '예외'를 고려하지 않는 사회적 완고함 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가족은 조금 예외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혹은 그 윗 세대에서 생긴 어떤 기묘한 기운으로 인해 아버지를 포함한 형제 일곱 중 다섯이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를 낳지 않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앙이 가족 안에 공고히 자리잡은 까닭에 성직자로 귀의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주노 디아즈 식으로 이야기하면) “푸쿠”의 변질된 형태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서울의 유쾌하고 시끌벅적한 환경에서 성장한 어머니는 헛기침과 고함소리가 공존하는 엄격한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로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푸쿠”를 학문으로 이겨내려 했고, 그렇게 삼촌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 가족의 유일한 며느리였던 어머니는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져야 했다. 어린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바라봤던 집안 풍경은 비교적 명료하다. 아버지는 항상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내가 “학교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하면 아버지는 살짝 고개를 들려 인사를 받아주고는 이내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책상을 제외한 모든 곳을 책임졌다. 나는 아버지의 필사적인 뒤통수와 어머니의 앙 다문 입술을 모두 기억한다. 이들은 아버지가 물려 받은 “푸쿠”를 나름 성공적으로 극복해낸 커플로 기억될 것이다. 불행히도 아버지의 막내 동생인 삼촌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사회에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잠은 장례식장에서 잤다. 동산동 아파트는 수녀님과 고모님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첫날 밤은 고모부와 어머니, 자형과 함께 잤는데 대충 방석과 얇은 이불을 깔고 잤다. 둘째 날 밤은 아버지와 어머니, 서울 고모, 고모부와 함께 잤다. 유가족 수면실에 화장실이 붙어 있었다. 다행히 뜨거운 물도 잘 나왔다. 이틀 모두 샤워를 하고 화장품까지 바르고 잤다. 푹신하지 않은 잠자리가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새벽에는 잠결에 이보다 더 편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피곤함은 가장 좋은 수면제다. 새벽미사 이후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지 못하는 문상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계산성당의 신자들이었으므로 내가 이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자녀가 없었던 삼촌의 상주는 유일한 남자 조카인 내가 되어야 했으므로, 나는 영정 앞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작은 문제라면 가톨릭 문화에서 문상은 절 두 번 반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는 문상 과정에서 길면 30분 이상 소요되는 위령기도를 바치는데, 대구 교구의 경우 기도문을 그냥 읽지 않고 특유의 가락을 붙여 읊는 전통(?)이 있다. 이 가락은 유교 장례식에서 듣게 되는 곡(哭)과 흡사한 형태로 느껴진다. 가톨릭은 다른 종교에 비해 지역 토착화가 비교적 덜 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장례문화에서만큼은 전통적인 유교적인 방식에 흡사한 모양새를 보인다. 유교의 조상과 비슷한 개념을 가톨릭에서 굳이 찾자면 성인(saint), 혹은 순교자(matyr)에 해당할텐데, 이 위령기도에서는 하느님과 성모님, 성인들에게 망자의 영혼을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끊임없이 애원한다는 점에서 현대 불교나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적 기복신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이 가톨릭 기도문에서는 ‘슬픔’이 거의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고, 기도의 힘으로 연옥의 고통을 면하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인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30분 넘게 소요되는 이 기도의 시간동안 상주인 나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양반다리를 한 채 앉아 있어야 했다는 점이다.
둘째날 나는 그렇게 총 일곱번의 위령기도를 문상객들과 함께 바쳤고, 입식생활만 했던 유학생활 이후 거의 하지 못하게 된 양반다리 자세를 오후 내내 하고 있어야 했다. 밥은 문상객들에게 내어주는 기본적인 육개장을 계속 먹었다. 매년 먹어야 하는 육개장의 총 그릇수가 사람마다 정해져 있다면 나는 벌써 그 마일리지를 다 채운 느낌이었다. 앞으로 당분간 육개장은 먹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과 함께 정말 맛있는 육개장을 끓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물론, 서울로 돌아온 후 육개장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둘째 날에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오전에 예정되었던 염습과 입관예절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삼촌이 유서를 남기지 않고 죽었으므로 자살의 징후가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타살의 흔적도 없었다. 대구 중부경찰서의 한 형사는 울부짖는 고모와 형제들을 딱하게 여겼을 수도 있고, 한 달 넘게 지속되는 더운 날씨에 지쳐 그저 귀찮은 절차를 생략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의사의 소견서에 기대어 병사로 처리된 검안서가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사고사로 되돌아온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된 시간은 당일 아침이 다 되어서였다. 최초 발견자인 대구 고모님은 경찰서로 불려가 심문을 받아야 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당연한 절차였다. 누군가 삼촌의 죽음을 의심한다면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담당 검사와 경찰의 몫이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삼촌의 죽음의 원인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올 모든 책임을 고려하는 것은 공무원의 본능적인 행동양태다. 결국 저녁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야 입관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고, 뒤늦게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염을 할 수 있었다. 망자의 시체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입관예절은 통곡의 장이 되기 쉽다. 시체는 단지 영혼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몇십년 간 보아온 살과 머리카락, 피부를 보면 울컥하는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어쩌면 장례 절차 자체가 이 ‘껍데기’일 뿐인 시체를 유가족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과정을 총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영혼이 있다면, 삼촌의 영혼은 입관 예절이 진행되는 그 시간 시체 안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온 육체 안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지순례를 좋아했고 걷는 것을 즐겼던 삼촌은 조금 더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답답한 장례식장을 이미 멀리 떠났을 것이다. 그의 흔적을 붙잡고 슬퍼하는 것은 유가족의 권리이자 욕망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른 하나의 사건은 묘자리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주인 나를 데리고 주교회관으로 가서 군위에 있는 가톨릭 묘원에 이미 사둔 가족의 묘자리 중 하나를 택해 미리 그 값을 지불해야 했는데, 당시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다섯 곳의 묘자리 중 엉뚱한 곳을 택하는 바람에 다음날 하관예절을 진행하기 위해 묘자리를 하나 더 파야 했다. 묘자리 비용과 장례 비용 모두 내가 돈을 보탰지만, 부모님은 며칠 뒤 전액을 내 계좌로 송금했다. “네 결혼비용을 미리 지불했다고 치자”라는 문자와 함께.
셋째 날에는 장례 비용 정산을 하고 장례 미사를 치렀다. 영정 사진은 상주인 내가 들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장례식에 이어 세번 째 드는 영정이었다. 관을 들 사람이 적어 운구차 기사의 손까지 빌려야 했다. 장례미사는 고모부의 형제 사제가 집전했다. 우리 가족은 대구 가톨릭 사회에서 큰아버지의 가족으로 기억된다. 큰아버지는 주교품을 받지 않았지만 교황으로부터 명예 전속 사제로 확정된 사제에게 부여되는 몬시뇰의 지위까지 오른 사람이다. 2012년 큰아버지가 소천했을 때 나는 한국에 없었다. 당시 연구실에서 아버지가 보낸 이메일을 통해 사망소식을 전달받았다. 아버지는 상을 다 치르고 난 후, 사망 후 나흘이 지난 다음에야 나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장례미사에는 누나도 참석했다.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인 누나는 아들 영건이를 데리고 새벽 네 시에 집을 떠나 기어코 아침 여덟 시에 대구에 도착했다. 다행히 영건이는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자신의 엄마를 독차지한 까닭인지 미사 내내 뿌듯한 표정이었다. 장례미사가 열린 계산 성당을 가득 채운 수녀님들은 영건이를 보며 신기해 했고, 영건이도 그들이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쳐다봤다. 누나는 미사만 본 뒤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대구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군위에 있는 가톨릭 묘원에 삼촌의 시체가 담긴 관을 묻는 과정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 이야기했듯 묘자리를 잘못 정한 바람에 묘를 다시 파는 해프닝이 있었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빛을 받으며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또다른 기도를 참아낸 끝에 무사히 흙을 덮을 수 있었다. 점심은 버스에서 빵으로 때웠다. 대구로 돌아와 연령회원들을 떠내 보내고 가족들을 동산동 아파트 옆 작은 식당으로 들여보낸 뒤 나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그 곳을 빠져 나와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내가 떠나기 전 대구 고모는 20만원을 내 손에 들려주었다. 대구에 갈 때마다 겪는 일이었다. 그의 사랑은 늘 헌신적이지만 일방적이다. 그 돈으로 동대구역에서 특실 표를 끊었고, 그로부터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바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누나네 가족의 이사가 있었다. 어머니는 함양에서 하루 휴식을 취한 뒤 서울로 올라와 누나의 이사를 도와주었다. 어머니의 역할은 첫째 손자 영건이를 돌보는 일이었다. 둘째 손녀 은호는 아직 낯을 가리는지 어머니의 품을 싫어했고, 덕분에 누나는 은호를 안은 채 이사를 지휘해야 했다. 나는 퇴근을 하고 바로 계양 누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할 무렵 사다리차가 막 철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자형은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로 나를 맞이했고, 우리는 근처 돼지갈비 집에서 식사를 한 뒤 돌아와 바닥을 닦고 쓰레기를 버렸다. 저녁식사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건이의 주장에 못 이겨 놀이터에 잠시 들렸다. 영건이는 놀이터에서 무척 열정적이었다. 자신보다 덩치가 크고 말도 잘 하는 다른 형님들에게 밀리지 않고 이 곳 저 곳을 뛰어 다니며 높은 기구에 도전했고, 새로운 방식의 낙하운동에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기꺼이 맡겼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뛰어다니는 영건이를 따라다니던 도중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대구에서 보낸 사흘의 장례 기간동안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는데, 영건이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누나와 자형은 영건이를 세상과 부딪히게 내버려 두었다. 그 곳에서 넘어지거나 다치는 것은 영건이의 몫이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는 가치들도 오롯이 영건이의 것이다. 세상을 향해 힘차게 뛰어가는 영건이의 그림자에는, 내가 알지 못한 삼촌의 어린 시절 모습이 겹쳐 있었다. 그 역시 네 살 무렵에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오랜만에 만난 손자로부터 그 간의 상처를 치유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손자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했는지 계양 집에 남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열 시 쯤 누나 집을 떠나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삼촌은 자녀가 없었으므로 내가 삼촌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부모님의 생각을 달랐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으로 연금을 받게 된 덕분에 부모님은 은퇴 후에도 삼촌에게 용돈을 보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보다 열 살이나 어린 삼촌을 ‘언제까지’ 도와줄 수는 없어 보였고, 그 몫은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착각이었는지, 혹은 스스로에게 행한 거짓말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내가 부모님의 존재를 핑계 삼아 삼촌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는 것은 우리 가족의 오랜 전통이었고, 나는 그 전통을 미국에 있는 동안 끊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미국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에 삼촌은 꼬박꼬박 답장을 해주었다. 우리가 카드를 통해 주고 받는 말들은 뻔한 안부 인사 정도였지만, 나는 그 카드를 통해 심리적인 면죄부를 받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먹고 사느라 여유가 없어서”라는 좋은 핑계는 “너의 더러움만큼 나도 더럽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 누구도 죄를 지은 여인에게 돌을 함부로 던질 수 없듯, 나 역시 돌을 맞아 상처를 입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이 삼촌의 삶을 구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삶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 쌓인 죄책감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