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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g Oct 04. 2023

부모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

아이를 낳은 후 부모님과 다시 만나는 과정에 대하여 

2023년 추석 연휴는 대체공휴일까지 포함하여 총 6일의 긴 기간이었다. 우리 가족은 연휴가 시작되는 목요일보다 이른 수요일 저녁에 집을 떠나 아내의 부모님이 계신 창원에서 토요일 오전까지 머물렀고, 이후 나의 부모님이 계신 함양으로 이동하여 월요일까지 머문 후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에게는 '외가'와 '친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뿌리는 '親하고 本이 있으며', 어머니의 뿌리는 '바깥(外)'에 존재한다는 이 용어의 원래 의미를 아이들이 아예 이해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대신 창원 진해에 있는 부모님 집은 '바다 할머니네', 함양 서상 남덕유산 자락에 있는 부모님 집은 '숲 속 할머니네'로 부른다. 만 세 살이 지난 요즘에야 비로소 아이들은 두 명의 할머니와 두 명의 할아버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눈치다. 


나의 부모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아이들을 낳은 2020년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해 2022년까지 그분들을 직접 뵙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아버지가 병적으로 감염 예방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깊숙이 손주들을 사랑하고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억누르면서까지 접촉을 차단하려 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당시 팬데믹은 노년층에 상대적으로 더 치명적인 질병으로 알려졌는데, 하필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가 폐렴에 걸려 꽤 오래 고생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생명에 대한 위협을 느끼던 상황이었기에 아이들의 예방접종 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외활동을 해야 했던 우리 가족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인적 관계를 차단한 채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 더해 기존에 앓던 심장병 등으로 인해 건강에 대해 극도의 예민함을 보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멀지 않은 거리에 거주하던 우리 가족으로서는 참고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 예민함의 정도가 어느 수준이었나 하면, 아이들의 100일 사진 촬영을 위해 부모님과 누나네 가족을 집으로 모은 날, 식사를 가족 별로 따로 하는 것은 물론, 사진 촬영을 위해 마스크를 내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셨다. 가족 간의 정보다 본인의 건강을 우선시하는 듯한 태도로 인해 실망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완고한 성품을 모르는 바 역시 아니었기에, 팬데믹에 대한 원망으로 덮어버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철저하게 전염 가능성에 대비했던 당신이었지만, 2023년 아주 사소한 이유로 인해 결국 팬데믹에 감염되었고, 팬데믹 치료약 한 알을 복용한 후 말끔히 모든 증상이 사라지면서 아버지가 견지해 오던 삶에 대한 자세 역시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3년 가까지 자식들을 보지 않으면서까지 지키려 한 가치는 어쩌면 무료로 획득한 알약 몇 알로 퉁쳐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며, 삶에 있어 더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신 듯 보였다. 이후 우리 가족이 예고 없이 찾아뵐 때에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반겨주신다. 심지어 이번 추석 연휴를 온 가족이 함께 보내기 위해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입에서 "우리는 이틀까지 가능해"라는 말씀이 나올 정도였는데, 이 것은 지난 3여 년 간 나와 아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수위'였다. 하룻밤 자고 가는 것도 극구 말리시던 분들이 이틀은 자고 가야 안 되겠니, 하고 권유하시는 모습에서 감사한 마음보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책임감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 책임감의 근원에는 '남아 있는 시간'에 대한 야속함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나의 나이는 마흔을 넘겼고, 더 이상 젊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여기저기에서 삐그덕거리는 신호가 발견된다. 몇 개월 전 부모님을 방문한 후 어머니는 나에게만 조용히 메시지를 하나 보내셨다. "너 아파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나의 건강검진표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이라니!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나의 부모님은 이제 그 끝을 준비해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아마도 훨씬 오래전부터 죽음을 생각하고 계셨을 부모님은, 최근 들어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양한 방식의 마무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만약 내가 먼저 죽으면, 네 어머니는 서울 근처 작은 아파트를 얻어 사부작거리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는 아버지의 말은 내게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키키 키린이 연기한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이내 어머니가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없게 되는 날이 얼마나 빨리 올까,라는 생각으로 넘어갔다. 내가 언제까지 나의 가족들, 즉 아내와 아이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부모를 부양한다'라는 개념이 희미해지는 요즘이지만, 나의 부모가 평생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나 역시 나의 부모가 어려움에 처하면 아무런 고민 없이 그들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다만 지금 내 어깨에는 아내와 아이들의 삶도 함께 얹혀 있다는 것이 전과 다른 점일 텐데, 이들 모두를 슬기롭게 보살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할 일이다. 


나의 부모가 살아온 궤적을 그대로 따라왔냐고 묻는다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아버지처럼 흙을 손으로 만지며 살고 싶은 생각이 없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인적이 끊긴 산속에서 유유자적하는 부모님과 달리 나는 넓은 아파트나 좋은 자동차와 같은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며, 아이들의 교육환경이나 아내의 취미생활 등 가족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아버지와 생김새가 무척 닮았으며, 고집이 센 성격도 비슷하다. 전공이 다르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과정도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쪽으로 귀결된 것도 결국 아버지의 생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분명 서울에서 나고 자랐는데, 아내나 아이들에게 무심코 던진 말에 밴 말투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억세게 구사하는 아버지의 흔적을 느끼기도 한다. 타인에게 독한 말을 잘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장점을 찾아내려는 습관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전적 자산을 바탕으로 사회화 과정을 거쳐 오랜 기간 다듬어진 하나의 산출물이므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과거 어머니와 아버지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서른다섯, 아버지의 마흔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 나이 서른다섯, 내 나이 마흔의 모습을 통해 그 나이 즈음의 부모님이 어떻게, 어떤 생각으로 살아갔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을 키울 때 특히 자주 경험하게 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자신과 부모를 동조화하는 경험은 나뿐 아니라 많은 초보 부모가 겪은 일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생후 100일 무렵까지 통잠을 자지 않았다. 이는 부모의 수면 조건 역시 시간 단위로 분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벽에 눈을 뜬 아이들에게 분유를 먹이고 소화를 시킨 후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놀아주는 세 시간가량의 그 시간에 유독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다. 이렇게 힘든 일을, 이렇게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힘든 일은 그분들은 어떻게 이겨내셨을까, 나는 과연 부모님 만큼 성공적으로 아이들을 키워낼 수 있을까, 너무 두렵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생각들이 주를 이루었고, 그 과정에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나의 이런 감상적인 생각이 이후 어머니가 하신, "너희 아버지는 너를 한 번도 안아주지 않으셨어.." "여보, 당신은 아이들에게 책 한 권이라도 읽어준 적 있소?" 등의 발언으로 어느 정도 현실화(?)된다) 말이 통하지 않은 어린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외로운 과정이었다. 그동안 누렸던 일상의 평안함을 송두리째 포기한 채, 먹고, 싸고, 씻고, 자는 원초적인 행위를 가능케 하는 보조자로서 집 안에 틀어박혀 생활하기 때문에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와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나의 상황을 그나마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내였는데, 아내는 산후 떨어진 체력과 모유수유 등 나름의 어려움과 싸워야 했으므로 서로의 상황을 세심하게 챙겨주기 힘든 노릇이었다. 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자라는 외로움과 우울한 감정은 스스로 다스리지 않으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해해 준 유일한 사람은 나의 어머니였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나와 아버지가 어린 시절 함께 찍은 사진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부탁드렸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네가 함께 찍은 사진이 몇 장 없구나."라며 몇 장의 인화된 사진을 찍어 메시지로 보내주셨다. 아이들과 셋이서만 깨어 있던 아주 깊은 새벽, 나는 그 사진들을 보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시간을 이겨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은 부모 외에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뒷모습만을 보여주는 시간도 늘었다. 앞으로 아이들과 함께 살 날


아이들이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고, 걷기 시작하며, "아빠"라는 말을 하고, 어느 순간부터 조리 있게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똬리를 틀었던 우울한 마음은 조금씩 사라졌다. 그림책을 읽어주거나 침대에 함께 누워 동화를 들려주는 시간, 혹은 어린이집 등하원길 한 시간여를 함께 자동차에서 보내는 시간에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치유를 경험한다. 아이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몸을 맞붙이고 놀고 씻고 먹는 과정은 실로 놀라운 배움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적 울림이 있다. 나는 아빠가 되는 방법을 배운 적이 따로 없다. 아빠가 된 첫날에는 분명 아빠의 자격을 전혀 갖지 못했을 것이다. NICU에서 며칠 먼저 퇴원하여 집으로 온 태오의 몸을 담요로 잘 감싸지도 못해 밤새 아이를 울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4년 가까운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며 조금씩 이들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이들이 나를 아빠로 생각하는지, 장난감이나 반려동물 정도로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나와 함께 씻기 원하고, 함께 놀기 원하며, 무서울 때에는 나에게 안기려 하고, 기분이 좋을 때에는 장난을 친다. 아이들에게 그런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아빠의 정의라면, 나는 조금씩 아빠가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나는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서 나의 아빠, 나의 엄마를 만난다.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나에게 건네는 말들, 건네는 손짓과 미소에서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드렸던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보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 기쁨이었을까. 이토록 순수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었을까. 이제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부모님에게 나는 어떤 자녀로 기억되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조금 더 힘을 내어 가족을 돌보게 된다. 아이들이 사는 세상에서 어쩌면 나보다 더 중요한 중심인 아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한번 더 염려하고, 피곤한 일상에 찌들어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더 반성하게 된다. 장시간 운전하는 것이 피곤한 일이기는 하지만, 부모님을 만났을 때의 기쁨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부모님 댁에 이틀을 머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주름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세월의 흔적도 가릴 수 없는, 여전히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가지고 계셨다.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헤어지기 싫어 울음을 터뜨렸고, 부모님의 집을 둘러싼 숲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가지런하게 들려왔다. 어떻게 정리가 될까, 어떻게 하면 나는 부모님을 조금 더 좋은 방법으로 만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졌지만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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