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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g Nov 20. 2022

그것조차 못 해준 주제에

이태원 참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어른들은 고개를 들면 안 된다

"'MZ'에서 'M'과 'Z'를 분리해야 해"


소위 'M'에 속한 지인이 최근 한 말이다. 나 역시 이에 크게 동의했다. 1982년생인 나는 '가까스로' MZ세대의 끄트머리에 속해 있다는 말을 듣지만, 이 세대의 중추를 이루는 90년~2000년대생 젊은이들의 문화적 코드를 정확히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이 있었고 취학 연령부터 영상 문화의 풍요 속에서 성장한 이들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그 윗세대와 결코 같을 수 없다. '세줄 요약'에 익숙하고 긴 글을 읽거나 쓰는 것이 버거운 이 세대는 '베이비부머'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며, 기성세대가 구축한 전통적인 세계관 속에서 성장한 내가 'Z'세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래서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하게 유행하기 시작한 핼러윈 문화 역시 내게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문화였다. 10월 마지막 주말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은 이태원이라는 특정 구역 안에서 남들과 다른 외모를 뽐내는 서로를 구경하는 것에 탐닉했다. 용산 미군기지로부터 시작된 이태원의 독특한 정체성과 맞물려 한국의 핼러윈은 기존의 많은 것들과 확실한 단절을 선언했다. 미국에서 꽤 오래 생활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수많은 미국 문화 중 '왜' 핼러윈 문화가 한국의 젊은 세대에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그 인과관계를 찾는 것은 지적으로 매우 도전적인 작업일 것이다. 핼러윈의 수출국이라 할 수 있는 서양 문화권과도 구분되는 특징을 여러 부문에서 보여주는데, 가족 중심의 전통적인 서구사회의 핼러윈 문화에서 수입한 요소는 현재 유행하는 문화 코드를 코스튬으로 재현한다는 것뿐, "Trick or treat"과 같은 대표적인 명절 의식(ritual)은 이태원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 나아가, 핼러윈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코스튬만 봐도, 그 안에 내재한 문화적 코드의 면면을 살펴보면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이라 비판받기에는 지나치게 한국적인 것들이 많았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한국의 핼러윈 문화가 스스로를 구분지은 가장 큰 지점은 바로 한국의 기성세대와의 단절이다. 1997년과 2008년을 거치며 더 이상 가정을 꾸리고 출산을 하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위태위태한 경계선으로 밀려난 한국 경제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윗 세대에 비해 더 가난한 아랫 세대를 탄생시켰다. 정규직으로 취직해 한 직장에서 몇십 년 근속한, 그래서 누가 대주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연금도 풍족하게 확보한 아빠와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사회생활을 비정규직으로 시작해야 하는 현실이 달갑지 않다. 더 나아가, 인적자본이 물적자본과 결합하여 부의 대물림을 공고히 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그 아이는 아마도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불평등의 산물이라고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와중에 설날이나 추석이랍시고 가까운 친척들이 모인 곳에 가면 (실업자가 될 것이 뻔한) 졸업은 언제 하냐, (바늘구멍보다 더 힘든) 취업은 왜 안 하냐, (내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힘든데) 결혼은 언제 하냐, 등과 같은 철없는 어른들의 잔소리에 시달려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에게 전통적인 명절은 극복 불가능한 불평등을 만들어낸 주범들이 그들만을 위한 자기만족을 즐기는 과정에서 또 한 번 희생되어야만 하는 불편한 자리인 셈이다. 이들에게는 윗 세대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 낄 자리가 '1도 없는' 그런 새로운 놀이 문화가 필요했다.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명절, 게다가 최신 문화적 코드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남과 다른 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 이들에게 핼러윈보다 더 적절한 선택지는 없었다. 정식 명절로 인정해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공휴일로 배려해달라고 한 적도 없다. 알아서 휴가를 쓰고 알아서 코스튬을 준비할 테니, 하루의 밤과 새벽 동안 떠들썩하게 놀 수 있는 공간만이 필요했다. 이태원은 핼러윈 문화가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가지고 있었고, 얌전하게 옷을 입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춤을 추거나 소리를 질러도 조용히 하라고 타박하는 어른들이 가장 없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억눌린 세대의 감정적 탈출구. 다소 뻔하지만 어쩌면 정확할, 1년에 딱 한 번 있는 그 주말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 백 명이 넘는 생명이 거리에서 사라졌다.


이 사건이 개인의 부주의에 의한 단순 사고인지, 행정 시스템의 실패에 의한 제도적 참사인지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150명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던 그 순간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마도 반드시 그 안에 '나의 탓'이 스며들어가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철이 없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다고는 해도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전혀 독립되어 있지 않았다. 항상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에게 의존해야 했고,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교수와 직원의 도움을 받아 성적표의 이곳저곳을 채워나가야 했다. 사회적으로 미숙했기에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그 과정에서 너그러이 나를 용서해준 어른들 덕분에 큰 벌을 받지 않고 성숙해질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내가 만약 방치되어 있었다면, 많은 어른들에게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쁜 길로 빠졌거나, 어쩌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20대는 원래 그런 존재이다. 잘 모르고, 예의범절도 부족하고, 생각도 삐딱하고, 절제할 줄 모른다. 그런 20대가 반성과 성찰의 기간을 통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어른, 혹은 기성세대가 할 일이다. 여러모로 부족한 젊은 세대에게 책임을 요구하기 전에 그들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공정하게 제공했는지 다시 살펴볼 일이다.


그 하룻밤을 즐겁게 놀겠다는 젊은이들의 심리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설날도 아니고 추석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해하기 전에 해주어야 하는 일들도 있다. 이해는 나중에 하더라도 지금 당장 놀고 싶다는 친구들에게 안전하게 잘 놀고 들어갈 수 있게 울타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좁은 공간에 갑자기 사람이 몰리면 동선을 지정하여 안내하고, 분위기가 너무 과열될 경우 적당한 선에서 통제하여 가라앉혀주는 것 정도. 놀고 싶어 하는 곳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지 않도록 지하철역을 적절히 통제하고, 다 놀고 난 사람들이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적절한 교통편을 제공해주는 것. 그들이 노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마음은 이와 같은 어른의 행동에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 감정이 들어오기 전에 반사적으로, 의무적으로 챙겨주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만약 내 강의를 듣는 학생 중 한 명이 그날 참사의 희생자였다면, 나는 다시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수업 시간에 '이태원은 밤 열 시 이후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택시 잡기가 불가능하거든요. 특히 핼러윈이 있는 주말에는 아예 이태원 근처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영락없는 기성세대가 된 지금의 내가 불쌍하고 가여운 젊은 세대에게 그조차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면, 나는 과연 어른이라는 자격증을 계속 가슴팍에 붙이고 다닐 수 있었을까? 나는 이번 참사를 막지 못한 어른 중 한 명이고, 그래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찰 조직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정치조직에 속한 사람도 아닌, 필부필부에 지나지 않는 한 시민일 뿐이지만, 참사 당일 보고 체계조차 제대로 유지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시스템을 가진 나라에 꼬박꼬박 세금을 납부하고 선거를 해왔다는 점에서 나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참사 후 며칠간은 쉽게 잠을 청할 수 조차 없었다. 그저 마음 편하게 잘 놀고 싶었을 그들에게, 그조차도 제대로 해주지 못한 못난 어른들이, 과연 이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아마도 그 지점에서 누가 어른이고 누가 어른이 아닌지 아주 쉽게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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