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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g Aug 17. 2022

강요된 육아

유일한 주양육자가 되기를 강요받는 여성의 고통에 대하여

이번에는 주양육자로서 느끼는 여성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주양육자(primary caregiver)가 한국에만 있는 개념은 아니다. 미국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주양육자에 대한 정의 및 책임소재가 비교적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다. 한 예로 미국의 경우, 한 사이트에 의하면 주양육자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주양육자(Primary caregiver)는 출생한 신생아 혹은 새롭게 입양된 영유아를 출생 직후 혹은 입양된 시점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보호할 책임을 갖는 이를 지칭한다. 주양육자는 영유아의 신체적, 혹은 그 외 부분에 있어 존재하는 요구(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사람으로, 오직 한 명 단수로 존재하며,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영유아의 생모(birth mother) 혹은 입양아의 주된 보호자로 지정된다. 


위의 법률 해석을 보면 미국의 경우 주양육자의 개념을 여성에게 부여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듯하다. 한국의 경우 양육자의 법률상 정의가 상대가 희미한 편이다. 실무적으로 친권과 양육권을 일치시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으로, 이혼의 경우 친권자와 양육자가 분리될 수 있고 이 경우 양육자가 단수로 존재하게 되어 사실상 위의 미국 법률에서 지정한 바와 같은 '주양육자' 개념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국은 미국과 달리 이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주양육자가 단수로 지정되지 않으며 부모에게 동등한 양육자로서의 권한과 의무가 주어진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물론, 영아의 출생 이후 병원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부부가 경험하였듯이, 오직 생모 만이 접근 가능하거나 동의 가능한 의료 상의 절차가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나는 지금까지 아이들을 양육하며 단 한 번도 '남성이라서' 양육자로서의 권한이나 책임을 제한당해본 기억이 없다. 


즉, 나는 한국사회에서 오직 여성만이 양육자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을 필요도 없으며, 그것을 위한 법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함께, 사회 통념 상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부여되는 주양육자의 지위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역시) 일반적으로 남성이 가계의 주 수입원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적 통념이 틀렸으니 지금 당장 고쳐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상과 원칙은 비교적 명확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고단하고 빡빡하다. 2년이 넘는 지난 시간 동안 직, 간접적으로 주양육자로서 여성이 느끼는 심리적, 육체적 부담이 상당함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차원에서 하나의 사회적 억압 기제로 작용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와 동시에, 가정과 사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남성에게 가해지는 압박감도 체험하였다. 여성과 남성에게 고정된 성역할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현실적으로 지켜지기 위해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과 남성 모두 구속된 책임감에서 주체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라는 자기 속박에서 탈출해야 하며, 상대 배우자에게 당당히 부모로서의 의무를 나누자고 이야기해야 한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 이 모든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부모와 사회가 함께 양육하는 것이 원칙이 되어야 하며, 부모가 출산 전, 후로 지극히 동일한 수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지금부터 나를 비롯한 몇몇 가족의 사례를 통해 한 가정이 강요된 육아에서 비롯되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아내와 나는 쌍둥이를 낳았다.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온 후 일어난 일이다. 서울에서 각자 직장생활을 하며 살던 우리 부부의 평범한 생활은 내가 지방 도시에 위치한 한 대학으로 이직하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아내는 직장을 관두었고, 우리는 함께 지방 도시로 이사했다. 맞벌이에서 외벌이로 전환되면서 가계의 명목적인 수입은 줄어들었지만 우리의 삶은 훨씬 여유로워졌다. 우리는 피곤에 절어 퇴근한 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잠드는 평일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고, 아내는 고단한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로 생긴 역류성 식도염에서 벗어났다. 주말은 평화로웠고, 처음 맞이하는 여름방학은 달콤했다. 그리고 아내가 그토록 바라던 임신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임신 시기는 꽤 적절한 편이었다. 여기서 "적절하다"는 표현은 '현실적으로 임신과 출산, 육아가 가능한(capable) 상황'을 의미한다. 이 사회에서 부모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계급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우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주거 공간을 확보해야 하고, 출생 직후 자주 들락날락하게 되는 근처 병원으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야 하며, 아이를 키우는데 추가적으로 소요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24시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손'이 있어야 한다. 부모의 정신적인 안정 등 정서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위에 열거한 이 모든 능력은 경제적 비용으로 치환될 수 있으며, 이 경제적 비용은 거주 지역과 부모의 직업, 그리고 부모의 부모(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의 지원 등에 의해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사회, 경제적 계급이 높을수록 다산한다는 가정은 지나치게 일차원적인 접근이겠지만, 가난한 집에서도 아무런 걱정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도 사실이다. 우리 부부는 출산과 육아에 진입하기 위한 문턱(threshold)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방 도시로 이주했다. 그 결과 우리는 임신에 성공하였으며,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야기한다. 


"서울에 계속 살았다면, 우리가 아이를 낳았을까?" 


임신과 출산, 육아에 이르는 몇 년 간이 과정 동안 아내와 나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 즉 경력단절의 심각성을 여러 측면에서 깨달아야 했다. 서울을 떠난 후 아내는 계속 '무직' 상태였다. 물론 '무직'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후에 반복적으로 강조하겠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그 어떤 노동보다 혹독한 희생을 요구하며, 이와 동시에 그 어떤 노동보다 명백한 삶의 가치를 획득하게 한다. 하지만 아내는 출산과 육아의 기간 동안 명목소득을 획득하는 일련의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이 사회에서 인정하는 '경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끊긴 30대 여성이 그 이전에 누리던 사회적 지위를 오롯이 회복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주변에서 익히 전해 들은 바가 있었기에 나름 각오했지만, 현실은 생각 이상으로 냉정했다. 수도권 외 지방에서 아내가 하던 일과 비슷한 일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다른 일을 하더라도 전과 비슷한 보수 수준을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단순 반복 작업이 대부분인 비정규직, 혹은 일용직이었다. 수도권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계 대기업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여성이, 몇 년의 경력단절 기간 동안 그 업무능력이 거의 퇴화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변한 것이라고는 주거지의 이전 정도 밖에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할 수 있는 직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로 마음먹은 아내에게 선택지는 사실상 육아, 하나였다. 육아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 아내가 다시 일을 찾아보았을 때, 그녀가 나에게 들고 온 것은 아파트 옆 상가 미술학원의 강사 자리였다. 최저임금 수준이라고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아내는 '무직'이다. 임신 기간을 포함하여 지난 3년 6개월여의 시간 동안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치열하게 살아왔음에도, 입사 지원서를 받아 든 회사가 평가하는 아내의 최근 경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내 아내가 극히 예외적인 사례는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함께 일한 한 조교 선생님은 서울의 명문 공대를 나와 세계적인 대기업에서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내려온 후 아이 둘을 낳았고,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나자 직장을 관두었다. 퇴사 당시 그녀는 '설마 내가 다시 일을 못 구하겠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후에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정규직을 구하지 못했고, 결국 터무니없는 연봉을 제시한 대학교의 비정규직 자리를 받아 단기간에 성과를 뽑아낸 후(그녀의 업무 능력에 대한 좋은 평판은 아주 빠른 시간에 학교 전체로 퍼져 나갔다) 비로소 상대적으로 조금 더 안정적인 학과 조교 자리로 옮겨올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은 식사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음에 너무 감사하다"라고 이야기했다. 학부 전공과 완전히 무관할뿐더러 직장 경력과도 연관성이 전혀 없는 일을 하면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나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 사회의 절반인 여성의 노동력이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낭비되고 있음에도, 그 어떤 유력한 집단도 이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 현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은 오직 여성 만이 경험하는 과정이다.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여성은 육체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변화"라는 표현은 무척 순화된 것이고, 사실 임신과 출산은 극한의 고통에 가깝다. 우선 36주의 임신 기간은 여성의 몸에 일어날 수 있는 몇 가지 굵직한 공포 중 하나다. 전에 없던 생리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것들을 통제할 능력을 조금씩 상실해간다. 출산 후 원래의 신체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상당한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출산이 가까워오면 거동이 불편해지고, 전에는 능숙하게 혼자 하던 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그러다 출산이 다가오면 문자 그대로의 고통이 시작되는데, 자연분만을 하든 절개 수술을 하든 출산 과정에서 심대한 수준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출산 직후 우리 부부는 '오로'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공식 의학용어는 아닌 모양인데,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오로(惡露)의 뜻은 다음과 같다. 


해산 후 음문(陰門)에서 흐르는 액체. 주로 혈액, 점액 및 자궁 속막 조직 따위가 섞여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3주일 정도면 깨끗해진다.


출산 직후, 일반적인 생리혈의 수배 가량이 한꺼번에 배출되는데, 시중에서 판매되는 생리대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병원에서 남편인 나에게 노인용 기저귀를 구입해오라고 할 정도였다. 오로의 '오(惡)'자가 욕설한 오다. 아무튼 출산은 욕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럽다. 


출산 이후 대부분의 여성이 조리원에서 1주에서 3주 정도 휴식 기간을 갖지만, 산모의 골반이 좁고 태아의 두개골이 큰 동양인의 특성상 이 정도의 기간은 몸 상태를 충분히 회복시키는데 턱 없이 부족하다. (물론 나는 산부인과 전문의가 아니기에 출산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와 주변의 사례를 바탕으로 넘겨짚는 수준이다. 나의 판단이 정확하지 못할 수 있다) '망가진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피폐해진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면 핏덩어리 신생아와 자신 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첫 출산인 경우, 울며 보채는 신생아에 대한 대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며, 이 미숙함은 여성과 남성 간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후천적으로 육성되는 능력인 셈이다. 출산과 관련하여 정부가 지원해주는 정책은 한 달의 산후 도우미 보조금과 약간의 출산 지원금, 그리고 120일의 출산 휴가가 전부다. 한 달간 '갓(god) 이모님'으로 많은 도움을 주는 산후 도우미가 떠난 후에도 신생아는 두 시간마다 일어나 울음을 터뜨릴 것이며, 모유수유가 원활히 진행되지 못한 여성의 경우 젖몸살로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에 시달릴 것이다. 밤부터 오전까지 이어지는 숙면을 의미하는 '통잠'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 피로도가 극단적으로 높은 수준까지 다다를 무렵 출산휴가는 끝나게 되고, 여성은 일터로 돌아갈지, 여전히 울며 보채는 아기를 계속 돌볼지 결정해야 한다. 이쯤에서 상당수의 여성들이 120일의 출산휴가에 1년여의 육아휴직을 붙여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여성의 경력단절에 있어 조금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육아휴직이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20년 약 11만 2천 명가량이 육아휴직을 사용하였고, 이 중 여성이 8만 4천 명가량으로 전체 휴직자의 75.5%를 차지하였다. 2013년 여성 육아휴직자의 비율(96.7%)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개선된 수치이지만, 이는 남성 육아휴직자의 비약적인 증가 때문이지 여성이 출산 직후 바로 일터로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여전히 출산 이후 자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육아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오직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 임신과 출산이라면, 육아는 성별의 구분이 거의 없는 공통의 영역이다. 모유 수유를 제외하면 육아의 전 과정은 여성과 남성 간 성적인 능력 차이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육아의 전 과정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출산 후 아기들이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글을 쓰는 지금까지, 육아의 전 과정에 걸쳐 나는 아내와 공동 양육자로서 그 책임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단순하지만 강렬한 것이었다. 그것은 육아를 처음 경험하는 입장에서 모든 조건이 동일할 경우, 육아의 거의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개인의 상황이나 능력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 성적인 차이는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앞선 문장에 '거의'를 붙인 이유는 모유 수유라는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쌍둥이를 낳았고, 아내 혼자 쌍둥이를 돌보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하였으므로 나의 육아 참여는 필연적이었다. 다행히 출산 당시 내가 가진 직업이 근태에서 꽤 자유로운 직업군에 속해(아기들을 재운 뒤 일을 하면 된다) 아내와 융통성 있게 육아 시간을 나눌 수 있었다. 또한 공교롭게 COVID-19 팬데믹이 막 시작될 무렵 아이들이 태어나는 바람에(?) 모든 강의 및 회의가 비대면으로 전환되었고, 이를 통해 재택근무와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아기를 하나 안고 Zoom 강의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신체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었고 업무 시간 중 육아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 불가피하게 발생하였으므로, 우리는 전액 자비를 들여 산후 도우미를 계속 고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산후 도우미와 우리 부부, 이 세 명이 함께 1년 간 쌍둥이를 키웠고, 이후 더 이상 산후 도우미를 고용할 경제적 여력이 되지 않자 아내와 나 둘이서 1년을 더 아이들을 키웠다. (쌍둥이의 경우, 당시 우리 부부가 지불한 산후 도우미 비용은 한 달 약 300만원 수준이었다. 적지 않은 비용이다. 가지고 있던 여유자금 전부를 도우미 고용에 지출한 셈이다) 주간에는 최소한의 강의 및 회의 시간에만 자리를 비우고 육아에 참여했고, 아기들을 재운 뒤 새벽까지 모자란 업무를 보충했다. 불가피하게 학교에 출근하는 날 점심은 사치였고, 새벽 2시 이전에 잠에 든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우리 부부 둘 만의 고되고 외로운 육아가 마무리된 시점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한 두 돌 무렵이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면 그때까지 받던 육아수당은 사라지고 대신 어린이집 비용(우리의 경우 한 사람 당 월 48만 원, 두 명 합계 96만 원을 어린이집에 납부한다)을 국가에서 바우처 형태로 제공한다. 평일 하루 7시간 정도 육아에서 해방되는 비용을 국가에서 납부해주는 셈이다. 


출산부터 어린이집에 보내기까지의 2년 간 우리 부부가 경험한 육아의 세계는 '다시 만난 세계'에 가까웠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보행로는 위험천만한 곳으로 재인식되었고, 집안 바닥에 자연스럽게 뒹굴던 작은 조각들 하나도 아기가 입속에 집어넣을까 싶어 예민하게 치워야 했다. 육아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수면 부족이었다. '100일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신생아의 통잠 능력 획득 시점까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두 시간 이상 연속으로 자는 것은 사치였고, 아예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적도 더러 있었다. 그 상태에서 산후 도우미님과 바통을 터치하고 출근하여 점심도 거른 채 급하게 일을 끝내고 다시 육아에 투입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아이들이 통잠을 자기 시작한 뒤에도 새벽에 뒤척이는 아기들을 보살피다 보면 얕은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최근 아내에게 휴가를 얻어 집을 벗어나 호텔에서 혼자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는데, 밤에 잠들어 오전에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한 후 너무 놀라 아내에게 호들갑을 떨며 문자를 보냈다. "여보, 내가 새벽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계속 잠을 잤어!" 이렇듯 육아는 성인이 최선을 다해 정성을 쏟아부어도 빈틈이 계속 발견될 뿐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체력을 극한으로 몰아붙여야 가능한 영역의 노동이다. (육아를 '노동'에 비유하는 것이 마뜩잖은 분들은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비교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단어 선택이라고 하고 넘어가자) 육아를 가사서비스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이를 산후 도우미가 받는 월급으로 치환할 경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쌍둥이의 하루 8시간 육아는 월 약 300만원 가량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다. 부모는 24시간 육아에 참여하고 여기에 주말 특근수당이 더해져야 하므로 그 경제적 가치는 넉넉히 잡아도 월 1,000만원 가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여성 혼자 '독박 육아' 형태로 수행한다면, 쌍둥이 엄마인 그녀는 어느새 대부분의 직장인들보다 더 높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고소득자로 우뚝 서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여전히 육아의 경제적 가치는 '0'으로 측정된다. 


사회적으로 이토록 천대받는 노동이 또 있을까? 비교대상을 다른 곳에서 찾기도 힘들 지경인데, 각 정부 부처에서는 오늘도 '저출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조 원의 세금을 쏟아붓고 있다. 이 코미디 같은 현실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고, 여기서는 다시 육아휴직 문제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출산 후 100일이 지날 무렵, 법적으로 보장된 출산휴가를 소진한 여성은 일터로 돌아갈지, 가정에 계속 남을지 결정해야 한다. 이때 여성이 일터로 돌아가는 대신 남성이 가정에 남아 육아를 전담하는 형태가 우리 사회에 '일반적'인가? 위에 언급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놀라운 속도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주 운이 좋은 경우였다. 교수라는 직업, COVID-19 팬데믹이라는 환경, 그리고 학과 및 학교 측의 배려 등을 통해 가정에서 육아에 매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일 오전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하는 삶이 일반적인 대부분의 사회인의 경우, 부부 모두 육아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둘 중 하나는 사회생활을 '희생'해야 하는 선택에 몰리게 된다. 만약 부부 모두 일에 집중하여 소득을 올리고자 할 경우, 업체를 통해 육아 도우미를 고용하거나 부부 중 한쪽의 부모, 즉 자녀의 조부모에게 금전적 보상을 약속하고 양육을 위탁하는 선택지가 남는다. 모든 선택지가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부부 모두의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월급 거의 대부분을 육아 비용으로 지출해야 한다. 혹은, 이미 노쇠하여 더 이상 아기를 돌볼 수 없는 신체조건을 가진 자신의 부모를 다시 고통스러운 육아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경력이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가정 내의 경제적, 사회적, 혹은 정신적 비용의 지불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여성으로 하여금 '희생'을 필연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적 시스템 실패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그렇게 '옳다'라고 인식되는 출산을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해냈는데, 왜 그 이후의 비용은 개인의 차원에 전가하는가? 이것은 분명한 시스템의 실패이고 시장의 실패이며 더 나아가 정부의 실패이다. 


2020년 기준으로, 육아휴직을 통해 부모가 스스로 아이를 돌보기로 마음먹은 가정의 75%가 여성에게 육아의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이 해 육아휴직에 들어간 가정의 약 75%는 여성이 주양육자로서의 위치를 획득했을 것이다. 25%도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공고히 쌓여온 사회적 통념을 무너뜨릴 정도로 전복적인 숫자도 아니다. 꽤 안전한 범위에서 우리는 '여성이 주양육자로서의 위치를 사회적으로 강요받고 있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가정 내에서 유일한 주양육자의 위치는 고통스럽다. 사회적으로 고립되며,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릴 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쇠약해진다. 모두 나와 아내가 경험한 것들이다. 한 기사에 따르면 육아휴직 후 복직 과정에서 원래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 어찌어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원래의 위치를 회복한다고 해도, 업무와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둘 중 하나에만 집중해도 벅찰 정도로 경쟁적인 사회다. 웹툰 <미생>에서 워킹 맘의 어려움이 여실히 보이듯,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한 여성이 그렇지 않은 경쟁자들에 비해 불리한 조건을 직면하는 사례는 주변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아이가 하나가 아니라 둘, 셋이 된다면, 이미 주양육자로서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 인정이 되어온 여성은 아마도 반드시 직장을 관두게 될 것이다. 육아의 과정에서 부모의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복수의 자녀일 경우 그 집중 관리 시기가 거의 매년 찾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일과 육아의 양립이 매우 힘들어지는 조건은 그래서  '2자녀 이상'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지원 정책이 전무한 한국에서는 그렇다. 한국의 출산율이 1.0 언저리에서 횡보하고 있는 이유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속한 가정은, 주어진 조건 하에서 이미 최선을 다해 아기를 낳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남편'의 역할은 어떻게 재조정될 수 있을까? 아내를 대신하여 육아휴직을 사용한 용감한 2만 7천여 명의 남편을 제외하고, 여전히 전과 다를 바 없이 사회적 경력을 유지하며 그 위치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대다수의 남편의 삶은 어떠한가? 이 역시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개선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남편은 육아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고 있다. 남성이 스스로를 주양육자로 인식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주변에서 만난 남성들의 행태에서 그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나이가 얼추 비슷한 지인 세 가족과 함께 2박 3일 일정으로 휴가를 다녀온 적이 있다. 먼저 네 가족 모두 두세 시간에 걸쳐 힘겹게 운전을 한 사람은 전부 남성이었다. 운전을 잘해서, 혹은 체력이 더 좋아서,라고 그 이유를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자동차 안에서 울며 보채는 아기를 달래는 법을 몰라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이 억측이 아님은 숙소에 도착 후 아기들을 거실 한쪽에 풀어놓는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약 다섯 명의 아기가 자유롭게 풀어져 있던 그 공간에서, 놀랍게도 나를 제외한 그 어떤 아빠도 아기들과 놀아주려 하지 않았다. 평소 아기들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장난감을 함께 가지고 놀며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아빠 세 명은 나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뿐, '식사는 어디서 할까', '아이들이 잠든 뒤 술은 어디서 마실까', '술은 어떤 것을 사지' 등의 진취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 다른 가족들과 왕래가 적었던 나에게는 살짝 문화충격이었다. 그들이 평소 자녀와 전혀 대화를 하지 않거나 한 번도 놀아주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충격받은 것은 그들의 태도였다. 육아에서 빈틈이 보이면 절대 안 된다는 강박관념은 주양육자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다. 아기라는 존재는 단 한순간이라도 방치할 경우 극히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육아를 '도와주는' 사람은 이것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다. 주양육자가 도움을 필요로 할 경우 지시받은 사항에 대해서만 성실히 이행하면 보조 양육자는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므로, 이외의 시간은 빈틈으로 놓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주양육자가 알아서 할 것이므로. 2박 3일의 일정 동안 나는 그 태도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공백'이 오직 남성들에게만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남성은 자녀를 씻기는 법을 몰랐고, 어떤 남성은 아이가 울면 무조건 아내에게 아이를 보냈다. 어떤 남성은 아이와 놀아주는 법을 몰라 쩔쩔맸다. 육아에서 책임지지 않는 부분이 최소한 하나 이상은 발견되었다. 여성들에게서는 그러한 부분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세 가족 중 두 가정이 맞벌이 부부였고, 나머지 한 가정 역시 여성이 짧은 육아휴직을 보낸 후 곧 복직 예정이었다. 여행을 함께한 세 가족 모두 명확하게, 여성은 스스로를 주양육자로, 남성은 스스로를 보조 양육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다른 지인 A 커플의 경우, 남편이 아내에게 '역할의 분담'을 요구했고, 자신이 맡은 역할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아침에 일어나 자녀의 식사를 챙겨주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라고 남편과 아내가 '합의'했다. 어느 날 아내가 미처 자녀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 남편은 아내에게 책임을 추궁했다.


나는 이 사례를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다. 자녀가 눈을 뜨면 당연히 부모 중 한 명은 함께 눈을 떠야 한다. 자녀가 식사를 요구할 경우 부모 중 그 누구라도 식사를 차려주어야 한다. '누가' 식사를 차려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육아는 자녀 중심으로 계획되고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A 가족의 경우, 남편은 아침식사를 담당하지 않으므로(그 전날 밤늦게까지 야근을 했는지 회식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날 아침에도 당연히 일찍 일어날 의무는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형적인 보조 양육의 태도이며, 문제는 이 가족 역시 맞벌이 부부라는 점이다. 


스스로를 보조 양육자로 격하하여 육아의 상당 부분을 여성에게 전가하려 하는 남성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떠안아야 하는 주 가계 수입원으로서의 책임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도 일말의 변명의 여지는 남아있는 셈이다. 한 논문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남녀 간 임금격차는 약 31.5%로, 2019년 OECD 평균 12.5%와 큰 차이를 보인다. 이 논문에서 수행한 실증분석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성별 간 임금격차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 중 여성의 육아휴직 기간 및 육아휴직 급여율 변수가 통계적으로 유의한 범위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육아휴직 급여는 그 전 임금의 40% 수준이다) 그러니까 남성 입장에서, '네 월급이 내 월급보다 낮으니, 가계를 부양하기 위해 내가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이 현명하다'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육아의 부담을 상대적으로 낮게 가져가고자 하는 욕망도 은연중에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틀린 주장이다. 남녀 간 임금 격차는 사회적 현상의 결과이자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점일 뿐, 어떤 행동을 결정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될 수 없다. 또한, 남성과 여성 간 경제적 능력 차이가 정말 31.5% 수준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원시시대에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남성과 여성이 벌어들일 수 있는 잠재적 수입, 즉 성별 간 노동생산성 차이가 극히 미비한 것이 현대 산업구조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므로, 명목적인 임금 격차가 31.5%나 발생하는 현실이 무언가 잘못된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정하려는 노력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만약 남성이 진심으로 배우자의 임금이 자신보다 낮은 이유에 대해 걱정한다면, 그 원인으로 지목된 육아휴직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본인이 대신 육아휴직을 사용해야 한다. 여성은 오직 자신만이 자녀를 돌볼 수 있을 것이라는 속박에서 스스로를 탈출시켜야 한다. 남편이 믿음직스럽지 못하겠지만, 계속 맡기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만큼 육아에 도가 트게 될 것이다. 육아는 성적으로 완전히 평등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부부간 존재하는 임금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경제적 비용을 가정 내에서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시스템적 문제가 존재한다. 왜 둘 중 한 명이 반드시 희생해야 하는가? 육아휴직이라는 경제적 비용이 반드시 부부 둘 중 하나에게 전가되어야 한다는 현실이 둘 중 누군가를 주양육자로 강요하는 주된 원인이며, 한국의 출산율을 지속적으로 떨어드리는 주된 요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출산을 결심한 부부에게 출산 이후 충분히 예상되는 경제적 비용을 국가에서 대신 부담하면 된다. 집중적으로 관리가 필요한 기간은 출산 이후 어린이집에 보내기까지 약 2년여의 잠재적 육아 공백기다. 거시적으로는 육아의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공동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정책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휴직이 직장 동료의 업무를 과중시키는 '해'가 아니라 미래의 성장동력을 생산해내는 가치 있는 과정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 차원에서는 산후 도우미 비용을 어린이집 바우처와 유사한 형태로 전액 보조해주어야 하며, 산후/가사 도우미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위해 도우미 노동자들을 준공무원 수준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현재 사설 업체 소속으로 직접적인 관리를 받고 있지만 서류상으로는 개인사업자로 등록되어 있으며, 사설 업체로부터 4대 보험 및 공휴일 휴무 보장을 비롯한 그 어떤 노동법 상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설 업체는 이에 대해 오직 '알선', 즉 중개업만을 수행할 뿐이라며 발뺌하고 있고, 이를 위해 산후 도우미는 출근하는 가정으로부터 직접 매달 월급을 수령해야 한다. 이것은 모두 업체의 소득을 과소 계상하여 세금을 적게 납부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으로,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이 부분을 시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산후/가사 도우미는 갓 태어난 영유아를 직접 만지고 돌보는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보육교사 및 유치원 정교사에 대한 관리와 비슷한 수준의 정책적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회사, 즉 사용자 입장에서는 출산과 육아의 주체에 대한 적극적 보호정책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사용한 직원에 대해 가장 높은 업무평가를 내리는 것은 어떠한가. 육아휴직 복귀자에 대해 부서 및 업무를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은 어떠한가. 물론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겠지만(회사를 다닐 당시 한 여성은 육아휴직을 최대한 길게 쓴 후 그 기간 동안 로스쿨에 합격하여 유유히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퇴사하였다) 이러한 당근 정책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은연중에 '저출산'에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출산과 육아에 수반되는 경제적 비용을 가계 차원에서 지불하도록 강요하지 말고 국가 차원에서 대신 지불해주는 것이 올바른 육아 정책의 첫걸음이라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 및 개별 지자체에서 실시해온 각종 출산 장려 정책 및 인구 증가 정책은 많은 부분에서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비효율적으로 진행되어온 측면이 크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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