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설킨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다
나는 지방 광역시를 배후도시로 하는 한 국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립대에 비해 저렴한 학비, 지역인재 채용제도 등 다양한 취업 기회, 상대적으로 큰 학교 규모에 따른 폭넓은 학내 지원 프로그램 등 거점국립대의 여러 특성상 그 지역 출신 학생들 뿐 아니라 다른 지역 출신 학생들도 많이 진학하는 편이어서, 강의실에서 만난 학생들이 다양한 지역의 사투리를 구사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국 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수도권 출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60명 정도의 수강생이 있다면 1,2명 정도가 수도권에서 이 지역으로 '내려온' 학생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대학교가 위치한 광역시 안에서도 진학을 많이 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명확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이 도시 내에서 소위 부유한 동네라고 알려진 곳에서 이 학교로 진학한 학생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노후한 동네 출신이다. 이를 해석해 보면, 이 도시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교육을 착실하게 잘 소화한 학생은 거점국립대로 진학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부모의 지원을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받은 이들 대부분은 수도권,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서울 내 위치한 명문 대학교로 진학한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서울에 위치한 한 사립대에 진학한 나의 경우, 학교에서 만나 사귄 친구들 중 대부분은 서울 강남 출신이었다. 열명이 있다면 그중 일곱은 서울의 대치, 방배, 잠실 출신이었고, 한 명은 서울의 다른 지역 출신, 그리고 두 명 정도가 부산이나 광주 같은 지방 대도시 출신이었다. 이것은 나의 '감'이나 상상이 아니라 통계자료로 확인된 추세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꽤 좋은 국립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많은 수험생이 서울의 비싼 생활비를 감내하면서까지 상경을 고집한다. 이들이 비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일까? SNS에 올릴 멋진 사진의 배경화면을 찾기 위해 성수동이나 이태원 근처에서 살아야만 하는 철없는 'Gen Z'인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졸보다 대졸자의 기대임금 수준이 높은 것이 현실적인 가정이라면, 졸업한 후 더 높은 기대수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명성 있는' 대학으로의 진학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다. 물론 여기에는 기대수익과 함께 그 대학에 진학하여 수학하는 과정에서 지출되는 많은 비용까지 고려되어야 한다. 최근 전국의 많은 학생들이 수도권의 퍽퍽한 삶의 질 (수도권의 인구 과밀 현상에 따른 출퇴근 시간, 평균 주거 비용 등 이를 설명하는 지표는 넘쳐난다)을 모르는 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대학으로의 진학에 집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 더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깊고 어려운 문제가 기저에 존재할 수도 있다.
정책 당국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꽤 괜찮다고 하는, 즉 평생 기대소득이 지원자로 하여금 중산층으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만들 정도라고 평가되는 기업 대부분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대학교 진학에는 등록금과 생활비 등 많은 비용이 수반된다. 특히 대학생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정기적인 수입을 창출하지 못하므로, 대학 진학에 따른 기회비용까지 고려한다면 대학에서 4년을 보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비용을 발생시킨다. 몇 천만 원의 비용을 감내해야 하는 대학생 입장에서는, 졸업 후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수입창출 기회를 포착해야만 이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생들이 보기에, 그 정도로 좋은 기업은 거의 대부분 수도권에 쏠려 있고, 해당 기업에 취직하기 위한 각종 정보 역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취업 스터디를 조직하여 준비하고 싶다면 선택지는 사실상 수도권 밖에 없는 셈이다.
"100대 기업 수도권 편중화 심화... 지방은 9곳뿐"
하지만 모든 대학생의 가정 형편이 위와 같은 선택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넉넉한 것은 아니다. 내가 속한 학교만 하더라도 꽤 많은 수의 학생들이 파트타임 등 노동과 대학생활을 병행한다. 임용 초기, 한 오후 수업에서 남학생 한 명이 강의시간 내내 꾸벅꾸벅 졸고 있길래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고 그 학생에게 피곤한 일이 있냐고 조용히 물어본 적이 있다. 그 학생은 평일에는 새벽 내내 노래방 알바를 하다 한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인 후 학교에 나온다고 대답했다. 새벽 노래방 알바를 하면 틈틈이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시급도 좋은 편이어서 선택했다고 덧붙였다. 알바를 그만두고 공부에 집중하라고 충고하기에는, 그 학생의 집안 사정 등을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거만하게 들릴 수 있는 일이었다. 이 학생과 같은 환경에 놓인 수험생 중 상당수가 상대적으로 이와 같은 금전적인 이유로 학비가 저렴한 지방 국립대에 진학한다. 하지만, 수도권 사립대를 포기하고 지방 국립대를 고른 그 선택이, '새벽 알바'를 멈출 수 있을 정도의 금전적 '쿠션'을 제공해주지 못할 뿐 아니라 졸업 후 취업 기회, 즉 더 나은 직장을 갖게 해주지도 못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지방소멸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대학교 등록금은 지난 20여 년간 사실상 동결되어 왔다. 이 동결이라는 것은 실질 변수(real variable)가 아닌 명목 변수(nominal variable) 상에서의 동결을 의미한다. 등록금 고지서에 찍힌 실제 숫자가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이다. 사단법인 대학교육연구소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7년 사립대의 평균 등록금은 약 740만 원이고 국립대의 평균 등록금은 약 422만 원 수준이다. 2013년과 비교하면 사립대는 약 4만 원, 국립대는 약 2만 원 인상되었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물가증감률은 계속 양(+)의 수준이었다. (1.3% - 1.3% - 0.7% - 1.0% - 2.1%) 즉, 한국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 물가증감률이 대학 등록금에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임금 등 가계소득을 포함한 물가는 계속 상승했는데 대학 진학에 따른 가장 큰 비용인 등록금이 제자리였다면, 대학 진학에 따른 실질 비용의 상대적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지난 20여 년 간 대학 등록금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혹은 사립대 등록금과 국립대 등록금 간 명목적인 격차가 계속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것은, 해당 기간 대학 진학에 따른 실직적 기회비용이 그만큼 감소했다는 의미이고, 더 나아가 '수도권 사립대에 진학하는 비용의 상대적인 실질가치'가 지난 20여 년 간 매우 큰 폭으로 하락했다는 의미이다. 즉, 수험생 본인이나 수험생을 둔 가계 입장에서는, 입학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좋은 기업에 취직하여 더 나은 수입을 획득할 확률이 매우 높은 수도권 사립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이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 된 것이다.
공공기관 몇 개를 지방으로 이전하는 노력은 한계적으로(marginally) 이 큰 흐름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겠으나, 채용규모나 기대수익 면에서 공공기관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사기업 대부분이 수도권에 위치하는 한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심화될 수밖에 없다. 혹은, 정부의 정책적인 노력에 의해 사실상 동결되어 온 대학교 등록금이 완전히 자율화되면 상황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연세대의 등록금이 한 학기 2,000만 원이고 부산대의 등록금이 한 학기 200만 원이라면, 부산 지역에 위치한 수험생 입장에서 고민할 지점이 발생한다. '현격히 높은 비용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더 나은 취업기회'와 '낮은 비용과 낮은 하지만 지금처럼 연세대와 부산대에 진학하기 위한 비용이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향인 부산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가는 선택은 학생 개인에게 있어 상당히 합리적인 판단인 것이다.
그런데 한 사회는 분절적으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거쳐 계속 이어진다는 특징을 지닌다. 최근 20여 년 간 대학에 진학한 신입생들의 부모님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까? 공교육이 무너진 것은 오래된 일이다. 나 역시 공교육 테두리 안에서 대학진학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습득한 기억은 찾기 어렵다. 대학진학을 위한 대부분의 지식, 혹은 수학능력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준비과정 대부분은 사교육 시장에서 이루어진다. EBS 교육과정과 수능 문제를 연계시키는 등 교육당국의 정책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장은 냉정하게 공교육의 '퀄리티'를 아주 낮게 평가해 왔다. 그 결과 수험생에게 투입하는 자본의 총량과 대학진학의 성과가 비례하는 현상이 최근 20여 년 간 두드러졌고, 좋은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랜 기간 사교육을 경험했는가에 의해 판가름 나는 세상이 되었다. 자녀에게 더 나은 사교육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면, 사교육 비용을 감당하기 위한 가계수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학군지'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고, 이 학군지의 지역적 특징을 살펴보면 기업이 집중되어 있는 도심 지역과 연결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부의 대물림은 지역적 특징에 기반한다. 좋은 가계수입을 획득하여 수도권에 안착한 부모는 학군지역에서 질 좋은 사교육 환경을 자녀에게 제공하고, 많은 자본이 투입된 자녀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수도권 명문대에 진학한다. 이는 다시 수도권의 우량한 기업으로의 취업 기회를 극적으로 확대시킨다. 역시 지역적인 이유에서다. 지방에 거주하는 부모와 자녀가 이 공고한 수도권의 자본 재생산 고리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수도권 대학으로의 진학뿐이다. 이 글의 맨 앞부분에서 언급한, 지역 내 부유한 동네 출신 수험생은 수도권 대학으로 진학하고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의 수험생만이 해당 지역의 국립대로 진학하는 현상은 이제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사교육에 대한 접근성, 기대소득 격차 확대, 자본의 대물림, 지방 국립대의 비용 측면에서의 경쟁력 약화 등이 얽혀 수도권 과밀화와 지방 소멸을 앞당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수도권에 겨우 정착한 젊은이들의 삶은 어떨까? 수도권의 면적은 물리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수직으로 올릴 수 있는 층수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수도권으로 유입되는 젊은 연령대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자본구조가 취약한 젊은 계층이 수도권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열악한 주거환경을 감내해야 한다. 공급되는 상품이 제한적인데 인구는 과밀화되니 여러 가격지수는 더 빠르게 올라갈 수밖에 없다. 출퇴근 시간은 한 시간에서 두 시간으로 늘어나고, 다달이 내야 하는 월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배가 된다. 장바구니 물가는 떨어질 줄 모른다.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잘 살 줄 알고 올라왔는데 매일매일의 일상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힘들다. 당연히 결혼 계획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출산? 꿈도 못 꿀 일이 되어버린다.
"결혼해도 애 안 낳아... '혼인 대비 출산비'도 역대 최저 수준"
인간에게 있어 사랑(love)은 꽤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애, 동성애, 모성애, 전우애 등 특정한 그룹 안에 이 감정을 규범화 지으려는 시도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각자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섹슈얼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그래서 만지고 싶고, 자고 싶다.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이성 간에 이러한 마음이 생기면 육체적으로 임신의 가능성이 열린다. 아이가 태어나고 가족이 만들어진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동성 간에 사랑이 발생한다고 해도, 국가의 정책적 지원에 따라 충분히 가족이 만들어질 수 있다. 가족은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자 사회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초적인 힘이다. 세대에서 세대로 사회가 이어지려면 출산이라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가족이 형성되는 과정부터 상당히 높은 진입장벽이 존재한다. 우선 결혼이라는 제도는 개인과 개인 간 법적 관계의 형성이라는 원래의 의미보다 훨씬 큰 문화적, 사회적인 함의를 지닌다. 가족과 가족 간에 이루어지는 많은 행위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기반한다기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거래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예물이라든지 '스드메'라든지, 심지어 '하객알바'까지, 사랑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문화가 존재한다. 결혼이라는 통과의례와 관련된 여러 시장이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다수 발생하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시장실패(market failure)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사랑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 그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까지 거친 많은 이들이 실제 결혼과 가정의 형성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문제가 존재하는 한, 한국의 결혼 시장은 사실상 시장실패에 가깝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한 두 개인이 하나의 가정을 형성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결혼만을 강요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역시 존재한다. 가족, 혹은 가정의 형성이 사회의 유지를 위해 중요한 가치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의 모습이 당연히 인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사회는 이성 간 결혼 만이 거의 유일한 가족의 형태라고 규정하는 듯 보인다. 유교중심 사회의 폐해라고 생각한다. 동성 간 결혼을 아예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개인, 혹은 동성 커플의 자녀 입양 역시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가정을 형성하는 다양한 방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한편 출산율의 저하를 걱정하는 기성세대가 있다면, 자신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한 번쯤 돌아볼 만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결혼, 출산, 육아 등 가족의 형성과 유지가 쉽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경제적인 부분에 기인할 것이다. 수입이 있는 수도권은 역설적으로 생계유지를 걱정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생활이 여유로운 지방에는 수입을 거둘만한 수입원이 없다. 지방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자니 수도권 대학에 진학시킬 자신이 없고, 수도권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자니 삶이 더 퍽퍽해질 것 같아 자신이 없다. 이것은 출산 장려금 몇백만 원 정도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이 하나를 낳고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내는 비용이 몇 억원이라면 그 몇 억 원 중 사회의 잘못된 구조로 인해 발생되는 부분을 면밀히 추정하여 그만큼을 지원해주어야 한다. 혹은 출산과 양육의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사회구조 개혁을 고민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근본부터 뜯어고쳐야만 비로소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이 다시 보편적인 가치 안으로 회복될 수 있다. 이도저도 할 수 없다면 이민정책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지만, '단일 민족'에 대한 환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한국사회의 국민성을 고려할 때 이 역시 쉽지 않은 부분이다. 이 폐쇄적인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외국인이란 한국 문화에 완벽히 순응하며 살아가는 전문직 백인, 혹은 자신을 망가뜨리며 웃길 수 있는 흑인 정도일 뿐, 완전히 다른 문화적 배경을 기초로 새로운 사회적 계층과 주거문화를 형성할 가능성이 있는 대규모의 이민자 집단은 철저히 배제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현재 근무하고 있는 학교 내 어린이집, 그러니까 직장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보낸다. 같은 반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친구가 있고, 윗 학급 '형님반'에는 중동 및 아프리카에서 온 아이들이 있다. 이들이 어린이집에 왔을 때에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이 아이들의 부모님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제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며, 놀랍게도 완전히 다른 인종의 이 아이들이 지닌 표정에는 한국의 색깔이 가득하다. 놀이터에서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한국사회의 평범한 어린 아이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차별도 없고 다름에 대한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함께 성장'하였기에 같은 그룹 안에 속하게 된 것이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학부생은 한국의 편의점 알바로 버는 돈이 자신의 아버지가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대학교수로 버는 돈보다 많다고 했다. 한국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많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다 보면, 지금 걱정하는 인구절벽과 지방소멸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다. 다름을 이해하고 새로운 문화를 함께 만들어나갈 시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함께 살아가면서, 전에는 모르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공유하는 사회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한 개인이 수정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에 서로서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해결책을 모색해나가야 한다. 이 글도 그런 차원에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