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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g Oct 11. 2023

육아의 고통과 슬픔

아이를 낳고 키운 후 얻게 된 병들에 대하여 

쌍둥이 남매가 태어난 2020년 2월 이후 지금까지 약 3년 반이 조금 넘는 기간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아이들을 낳지 않았다면'이라는 상상이 불가능할 만큼 이들은 나에게 무한한 기쁨과 행복감을 가져다주었다. 아이들의 귀여운 행동을 볼 때 느껴지는 심장의 저릿함은(정말로 심장이 아프다) 그 어떤 다른 쾌락에 비할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쉽지 않다는 말은 대단히 순화된 표현이며, 현실은 그보다 조금 더 고통스러웠다. 마흔 살을 넘어서면서 몸과 마음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육아라는 과정이 여러 가지 문제를 심화시켰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육아는 힘들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며, 인류가 진화를 거듭하던 시기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출산과 육아가 본능과 관습의 영역에서 목적성을 가진 선택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은,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남녀차별과 인종차별이 공공연하게 묵인되는 구시대적 유교적 관습이 강하게 남아있는 사회,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이 매우 높고 아주 어린 나이부터 치열한 경쟁을 통한 생존을 강요받는 사회, 영국 시사잡지 The Economist가 정확히 지적한 바와 같이, '단 한 번의 기회'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양육하여 온전한 성인으로 길러내는 행위는 결코 자연스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The one-shot society


실제로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보니, 다음의 몇 가지 환경적 요인에 의해 육아의 난이도가 많이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첫째, 양가 부모님 중 최소 한쪽은 지근거리에 살면서(직주근접) 육아를 보조해주어야 한다. 육아를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보조 인원이 있다면 육아가 훨씬 수월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은퇴 연령에 가까운 조부모가 육체적으로 고된 육아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인 것도 사실이다. 둘째, 맞벌이, 혹은 그에 준하는 충분한 가계수입이 확보되어야 하며, 부모 중 한쪽이 질병이나 원거리 근무 등의 이유로 육아에 참여하지 못할 경우 이를 대체하는 인원이 반드시 투입되어야 한다. 즉, 부모는 신체적으로 항상 준비된 상태여야 하며, 물질적인 풍족함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곤란한 상황에 자주 내몰리게 된다. '가난해도 아이를 키울 수 있지만, 물질적 가난함은 후술 할 육아가 초래하는 정신적 가난함으로 이어져 장기적으로 매우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셋째, 국가의 도움은 매우 제한적이며, 이를 기대하는 것은 육아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부모가 알아서 시장에서 효율적인 육아 수단을 찾아야 한다. 국가에서 제공하는 육아 보조 수단은 '없어도 상관없는 수준'인데, 예를 들어 아동 1명 당 10~20만 원 수준에서 지급되는 보조금과 생후 첫 한 달 제공되는 산후도우미 제도 등이 그것이다. 출산을 장려하기는커녕 부모에게 위로조차 건네지 못하는 수준의 국가 정책은 부모로 하여금 육아의 전 과정을 오롯이 감내할 것을 강요한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의 출생 당시 위의 환경적 요인에 대한 준비가 충분하지 못한 경우였다. 양가 부모님은 우리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계셨고, 각자 생업 등의 이유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기에 육아를 위해 거주지를 옮겨 달라는 무리한 부탁은 차마 꺼내지도 못했다. 오래 거주하던 서울을 떠나 연고 하나 없는 지방의 도시로 이사 온 후 낳게 된 아이들이니 주변에 도움을 청할 친척이나 지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지방의 도시로 함께 내려오기로 결정한 후 아내는 직장을 관둔 터였기에 가계수입도 넉넉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저축해 둔 금액은 출생 후 약 1년 간 도우미 이모님에 대한 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과정에서 깔끔하게 소진했다. 도움을 청할 지인도, 여윳돈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 부부가 가진 선택지는 '몸을 갈아 넣어 몸으로 때운다' 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2020년 시작된 팬데믹으로 인해 학교는 문을 닫았고, 모든 강의가 비대면으로 전환됨에 따라 나는 운이 좋게도(?) 출생 후 2년 간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처음 1년은 도우미 이모님이 함께 계신 덕분에 가끔 출근할 수 있었지만, 첫 돌부터 만 2세가 되어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게 된 2022년 3월까지 1년의 기간은 전적으로 아내와 나 둘이서 쌍둥이와 함께 고군분투해야 했다. 아내는 나를 공동양육자로 인식하는데, 실제로 지난 3년 반동안 육아와 가사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공유하며 서로의 빈자리를 보완해 나가는 사이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부부들끼리 흔히 이야기하는 "전우애"와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결이 다른 개념인데, 육아와 가사의 과정을 분담하는 동료일 뿐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을 매일 목격하는 과정에서 얻는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이라는 점에서, 출산 전보다 훨씬 애틋하고 가까워진 인생의 유일한 '말 벗'으로 진화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지, 또 얼마나 고집불통이고 이기적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부부 서로일 뿐이다. 생물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인 부모조차 한 발자국 떨어져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이들에게 높은 수준의 이해를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가장 힘들 때에도, 가장 기쁠 때에도 가까운 곳에서 함께 감정을 나누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내뿐인 것이다. 


하지만, 쌍둥이 육아를 부부 둘이서 전적으로 부담하는 과정에서 신체적, 정신적인 무리가 따른 것도 사실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육아의 고통스러운 과정은, 유독 나만 심하게 겪은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적인 아픔이기도 하다. 오히려 나는 이 사회의 많은 아빠들에 비해 굉장히 좋은 조건에서 육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몸과 마음은 육아를 하는 지난 3년 반동안 많이 망가졌으며, 이 상태가 회복되어 정상화될 것이라는 기대는 현재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 '무너져 내림'을 어느 정도 늦출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술 할 이유들로 인해 이 역시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100일 무렵까지, 흔히 이야기하는 '100일의 기적' - 영아가 생후 100일 무렵이 되면 새벽에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5~8시간가량 수면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 이 오기 전까지는 피로와의 싸움이었다. 영아가 부모와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상호작용을 하는 시점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데, 그 시기가 올 때까지는 먹이고-소화시키고-놀아주고-재우고-씻기는 과정이 반복된다. 우리 아이들 같은 경우 세 시간 간격으로 일정하게 기상-취식-소화-놀이-취침 과정이 반복되었고, 사이사이 목욕이나 산책 등의 일과가 함께 수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부모의 휴식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 중 부모 중 최소 한 명의 수면시간은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 부부의 경우, 아내가 쌍둥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신체에 상당한 무리가 발생하여 체력이 크게 떨어졌고, 이후 모유 유축 과정에서 젖몸살이 발생하는 등 신체적으로 여러 고생을 한 터라 새벽 수유는 거의 대부분 내가 담당하였다. 새벽 수유를 맡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새벽에 잠을 자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깨어 있는 것을 말한다. 쌍둥이 두 명이 동시에 일어나서 동시에 잠들면 참 고맙겠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나서 잠드는 시점이 각각 달랐을 뿐 아니라(태오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형, 루나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올빼미형 수면 습관을 가지고 있다), 두 명 각각 차례대로 안아서 수유하고 소화를 시켜준 후 재워야 했기에, 사실상 아이들 옆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은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하루에 총 한 시간 정도.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아이들 중 한 명이 울고 있었다. 


하루 이틀 정도는 그렇게 살아봐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3개월가량 위와 같은 상태가 반복되면 신체적으로 상당한 피로가 누적된다. 심지어 나는 당시 외벌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막중하게 느끼고 있던 터라, 아침까지 아이들 케어를 전담한 후 오전 9시에 이모님이 집으로 오시면 바로 씻고 출근하여 학교에서 비대면 강의 및 회의, 기타 업무 등을 처리하고 오후 5시 이모님 퇴근 전까지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저녁 시간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본 후 다시 새벽 수유 담당. 이 생활 패턴에서 나의 수면 시간은 사실상 거의 확보되지 않았다. 초보 엄마에게 쌍둥이를 혼자 맡기는 것은 늘 미안한 일이었기에 5시 넘어까지 일을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점심을 건너뛴 채 일할 때도 부지기수였다. 동료 교수님들의 너른 배려 덕분에 회의 시간 등을 조정하여 10시에서 4시 사이의 업무 가능 시간에 최대한 많은 일들을 욱여넣었다. 2020년은 대학교로 돌아온 지 3년째였기에 아직 적응하는 단계였고, 업무 강도는 꽤 높은 편이었다. 문제는 이 피로가 극에 달할 즈음에 터졌다. 


아내의 어머니, 즉 장모님이 아이들을 보시기 위해 집에 머물고 계시던 때였다. 사실, 그때 장모님이 내게 했던 말은 사실 그리 심한 언사가 아니었다. 딸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기 안쓰러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극히 자연스러운 범위의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 말들 중 지금도 내 마음에 남아 하루종일 나를 괴롭히는 표현들이 있다. 한 번은 내가 밤을 꼴딱 새운 후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순간, 현관으로 마중 나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김서방, 이제 좀 쉬러 가는구먼."


이모님에게 잠시 아이들을 맡기고 아주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욕망을 이겨내며 억지로 출근하려 하는 내게 "쉬러 간다"는 평가는 당시 너무 박하게 느껴졌다. 아, 이 분에게는 내가 아이들에게 떨어져 회사로 가는 것이 쉬러 가거나, 혹은 도망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다. 다른 한 번은, 새벽 수유 후 아이들을 보고 있는데 다른 방에서 주무신다고 생각했던 장모님이 나와 내 옆에 앉으셨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새벽에 내 딸을 깨우지 않았으면 좋겠네. 새벽에는 자네가 아이들을 보고, 주간에 이모님 계실 때 딸아이가 함께 보면 되지 않는가."


당시 실제 그렇게 하고 있었고, 굳이 말씀하지 않으셨더라도 그렇게 계속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말을 사위에게 했다는 것은, 아침 9시 이모님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안방으로 '퇴근'하는 아내와, 아침 9시 이모님이 오시는 것을 확인하고 학교로 다시 '출근'하는 나 사이에서 조금 불공평한 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시 큰 상처로 마음에 남았고, 지금도 내 마음에 남아 괴롭히고 있다. 


이 외에도 장모님은 집에 머무는 동안 여러 면에서 나와 부딪혔다. 물론 표면적으로 우리 둘이 언쟁을 벌이는 식으로 부딪힌 적은 없다. 장모님이 간섭하면 내가 삼키는 식이었다. 영아를 처음 접하는 초보 부모와 아이를 키워본 지 30년이 지난 할머니가 쌍둥이를 함께 보면 많은 면에서 실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때 누군가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할 것이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당시 가족 구성원 모두가 극도의 신체적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고, 몹시 예민한 상태에서는 아주 작은 의견 차이로도 날카로운 표현이 오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타인에게 심한 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아내의 표현에 의하면 "표정에 이미 다 드러나 있는" 유형이다. 장모님은 당신이 답답한 것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쪽이다. 예민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성격이 잘 맞지 않으니 문제 해결 과정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지'싶다가 도, 그 당시에는 그 행동과 생각이 최선의 결과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는 남는다. 


장모님과 가장 닮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아내였다. 결혼 후 만난 한 지인이 밝힌 소신이 생각난다. 


"결혼하기 전 반드시 장모님이 될 분을 먼저 만나봐야 하다. 당신의 아내가 나이 들면 바로 그 장모님의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아내는 여러 면에서 장모님과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심정적으로 어머니를 이해하는 것이 남편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은 어머니가 아닌 나와했기에, 남편과 어머니 사이에서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도 사실이다. 아내는 나와 성격이 매우 달라 마음속에 불편한 감정을 오랜 기간 쌓아 놓지 않는 편이다. 갈등이 발생하면 그 즉시 풀어야 하고, 뒤끝도 남기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한 때 장모님에게 들었던 말을 마음속에 쌓아두고 계속 고통받는 남편의 모습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수 있다. 지금도 나는 현재 진행형인 정신적인 어려움을 아내에게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것은 그 누구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할 성질의 것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 아내에게 섭섭하거나 원망하는 감정 역시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극복하거나, 계속 안고 살거나, 결국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미약한 수준의 우울증과 신경쇠약 증세가 지속되었다. 일상에 지장을 미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의사의 처방 없이 버틸 경우 하루, 혹은 이틀 정도 몹시 우울한 기분과 무기력증 온몸을 뒤덮었다. 아주 작은 아내의 실수에도 크게 실망했으며, 내가 저지른 아주 작은 실수에도 미안하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매일 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항상 죽음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소중한 아이들이 눈앞에 있는데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쁜 순간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마음을 다잡고 이겨낼 뿐, 그 생각 자체를 떨쳐버릴 수는 없다. 매일 아이들을 목욕시킬 때에는 3년 전 초보 아빠 시절 서툴게 아기를 목욕시키던 모습을 지켜보던 장모님이 지나가며 던진 가벼운 핀잔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고개를 흔들며 이겨낸다. 야행성인 딸아이가 쉽게 잠들지 못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줄 때에는, 3년 전 새벽에 울던 아기를 재우지 못하자 뒤에서 아기를 채가던 장모님의 손길이 떠오른다. 매 순간을 그저 이겨낼 뿐이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성인이 된 후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혀온 허리 통증은 육아를 거치며 확고한 허리 디스크로 발전하였다. 한 번은 혼자 차를 운전하여 출근하던 중 뒤에서 큰 트럭에 받히는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데, 이후 검사 결과에서 허리 디스크가 발견되어 "혹시 사고 때문인가요?"하고 의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의사의 대답은 절망적임과 동시에 희망적이었다. 


"아닙니다. 이 디스크는 아주 오랜 기간 천천히 빠져나왔어요. 지속적으로 무거운 것을 들거나 했을 경우 이런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혹시 육아하시나요?"


몹시 피곤한 얼굴의 그 의사는 내 나이 또래였다. 그가 아이 아빠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동료애를 느끼며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허리디스크는 척추를 타고 올라가 목디스크로 발전하였고, 어느 날은 평범하게 걷던 도중 갑자기 발목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발목 인대가 끊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관절 부위에서 오는 부상은 육아를 하며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통증이다. 일종의 세금 같은 것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조금 더 걱정스러운 신체적 위협은 잘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발현되고 있을 것이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으로 가끔 발가락이나 손등에서 국소적인 통증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것이 대상포진으로 발전하거나 CRPS로 발전하여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목 뒤가 뻐근한 느낌은 아이들의 출생 이후 지속되고 있지만, 이것이 뇌졸중으로 발현되어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것 같다. 가족력으로 확인된 심장병은 가끔 부정맥의 형태로 느껴진다. 


이 모든 신체적 위험 신호가 육아를 위한 '갈아 넣음'으로 인해 강화되고 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부담해야 했던 피로 중 상당 부분이 물질적인 능력, 즉 금전적인 능력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마음의 가난함이 조금 더 심해진다. 만약 나의 수입이 충분하여 아내를 도울 가사도우미를 조금 더 오래 고용할 수 있었다면, 나는 장모님과 덜 부딪힐 수 있었을까?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었을까? 업무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 육아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 아이들의 똥과 오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과정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손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관전'하는 것이 편한 육아라면, 나는 그 육아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록 잠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몸이 조금 더 힘들더라도, 내 아이들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을 위해 가장 낮고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지금 나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다. 매일 목욕을 시키고 밥을 해먹이고 배변활동을 도와주고 함께 놀아주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이것을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다. 나의 몸과 마음이 망가진다 하더라도, 아니 나의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것 정도라면, 아주 저렴한 비용이라고 생각한다. 생에 다시 오지 않을 큰 행복과 기쁨이 아주 확실하게 기다리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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