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들과 나의 아버지가 이어지는 순간을 목격한 것에 대하여
지난 6월 1일은 아버지의 생신이었다. 우리 가족은 모처럼 두 분이 사시는 곳에 '쳐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사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곳에서 차로 한 시간 반 거리면 닿는 곳에 계시기에 찾아뵙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나, 지난 2년 간 부모님을 만나는 횟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왔다. COVID-19 팬데믹이 장기화되면 부모님은 외부로부터의 방문을 철저히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그 '외부'에는 우리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 70세를 넘긴 아버지의 몸은 드문드문 찾아뵐 때마다 노쇠화의 징후를 뚜렷이 나타냈다. 노인층 치명률이 유난히 높은 이번 팬데믹을 겪으며 여러 층위에서 '기저질환 노인층'에 포함되었음을 명백히 인지한 부모님은 공기 맑고 인적이 드문 현재 거주지에서 둘 만의 삶을 공고히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손자 손녀를 보고 싶은 마음은 카톡에 실린 사진이나 영상으로 달래시는 것처럼 보였, 으나 아내의 '독심술'에 의하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구나'라는 마음을 매 순간 표출하고 계셨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마음을 항상 잘 읽지 못해 아내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평생 같이 산 아들이 그것도 몰라? 하는 그녀의 꾸중은 사실 농으로 흘러 넘기기에 꽤나 아프게 와서 박힌다. 내 아들과 딸을 보고 활짝 웃으며 어떻게든 달래 보려 애쓰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일은 지금은 매우 낯설다.
아버지와 살갑게 살을 맞대고 정을 나누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이들을 낳은 후 며칠 되지 않아 우울증이 왔는데, 이를 어떻게든 이겨보기 위해 어머니에게 '아빠와 내가 함께 나온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사진이 별로 없네"라고 하시며 서너 장을 보내주셨는데, 갓난아이였던 내가 아버지와 함께 TV를 보는 모습, 함께 목욕을 하는 모습, 나들이 자리에서 돗자리를 펴고 함께 앉아 있는 모습들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내가 기억하는 대여섯 살 무렵부터 아버지와 단 둘이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아버지와 무언가를 함께 한 기억이 없으니,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다. 동료 교수님은 "우리 세대는 대부분 그렇게 자랐잖아요"라고 말씀하셨지만, 막상 아들을 낳고 키워보니, '어쩜 아빠는 나에게 그랬을까?' 하는 서운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딱 세 가지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인사를 하기 위해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갈 때마다 마주쳤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 첫 번째 모습이다. 내가 인사를 하면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대꾸한 후 이내 다시 책으로 파묻혔다. 두 번째 모습은 마당에서 일을 하던 모습이다. 서울 부암동 주택에 살기 시작한 1990년 대 초반 이후,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초기부터 아버지는 마당일에 천착했다. 끊임없이 잡초를 뽑고 바위를 날랐다. 이 쪽에 있는 흙을 저쪽으로 옮기고, 멀쩡하게 잘 있던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었다. 육체노동은 아버지에게 매우 중요한 예식처럼 보였다. 어린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세 번째 모습은 안방에서 어머니와 즐겁게 수다를 떨던 모습이다. 부모님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셨고, 나는 방문 앞에 귀를 대고 몰래 엿듣곤 했는데, 대부분 타인에 대한 험담, 혹은 어디에 있는 땅을 사야 한다는 내용뿐이었다. (물론 실제 대화는 그보다 더 풍부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십 대의 나에게 할애한 시간은 가끔 함께 캐치볼을 할 때뿐이었다. 하루에 30분 정도. 글러브를 두 개 쥐고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가 "함께 공을 던지시지 않겠어요?" 하고 물어보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엄격함 그 자체였고, 오늘은 무엇으로 혼날까 걱정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였으며,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함께 놀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30분이 나와 아버지 사이에 벌어진 거의 모든 추억이다. 그 시간마저도, 나는 아버지에게 '잘 던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잘 던져야 했다. 잘 던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30년을 훌쩍 넘긴 교수 생활을 은퇴하던 무렵, 퇴임 고별 강연에서 나에게 발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위의 내용을 말하리라 다짐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세 가지뿐이지만, 늘 강의 준비를 성실히 하시고 학생들을 사랑하셨으며 퇴임하시는 순간까지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더라, 하는 멋진 구절도 나름 준비했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낼 기회는 결코 오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다들 한다는 고별 강연도, 성대한 은퇴식도, 퇴임 기념문집 제작도 하지 않고 황급히 서울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에게 서울은 번잡스러운 곳이었고, 어서 빨리 탈출해야 하는 필요악 같은 존재였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덕유산 자락으로 피신한 후 아버지는 비로소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두 분의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큰 땅을 사들인 후 조금씩 풀과 꽃과 나무와 야채가 자랄 수 있는 환경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삶의 가치를 다시 찾은 것처럼 보였다. 낮에는 밭일을 하고 해가 지면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일상을 전화로 전해 들으며, 나는 이것으로 되었구나, 생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렇게 삶의 마지막 챕터를 무사히 펼쳤다고 생각하며, '아들로서의 걱정'은 그들이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할 때까지 잠시 넣어두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아내와 결혼할 때부터 최대한 부모님과의 접촉면을 넓히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미 충분히 독립적인 분들이기에 '새로운 가족'과 같은 불편한 관계를 선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결혼 전 여기저기에서 지겹도록 들어온 '시부모와의 갈등' 이슈가 우리 부부의 삶에 끼어들 가능성을 조금도 열어두고 싶지 않았다. 각자 행복하게 잘 삽시다, 가 나의 기본적인 입장이었고, 구성원 모두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입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매일 매 순간 떠올리며 살아가지만, 이제는 엄연히 한 가족으로 묶일 수 없는 위치에 있고, 각자의 삶에 개입할 여지도 충분치 않다. 부모님만큼이나 나의 고집 역시 강해졌고, 부모님보다 더 소중히 지켜야 할 '나의 가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저 무던히 소식을 기다리다 도움이 필요할 때 주저 없이 몸과 마음을 다하여 움직이는 것, 그것이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이들을 낳은 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이렇게 굳게 다진 마음이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팬데믹 기간 중 가끔 아이들과 만날 때마다, 아버지는 아들 태오가 당신을 자꾸 피하는 것에 상당히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눈치 빠른 딸 루나는 아예 아버지 근처로는 얼씬도 않은 채 어머니, 혹은 아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기에 아버지는 손녀와의 접촉의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다) 밝고 예쁜 것에 잔뜩 노출되어 자란 어린아이가 어두운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채 억센 경상도 말투로 다그치듯 안겨보라고 하는 노인 남성을 좋아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아주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말이다. 태오가 아버지를 무서워한다면, "에잇! 이놈" 하며 아버지가 뒤돌아서는 것으로 둘 사이 관계가 정리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버지가 다른 경로를 택했다. 어떻게든 한번 안아보자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들 앞에서 두 톤 정도 높은 목소리로 상냥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근처에 잡히는 과자나 간식으로 유인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노력은 두 명이 만날 때마다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고, 태오 역시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어두운 옷을 입고 수염을 깎지 않았으며 경상도 말투를 고치지 않았기 때문일까?)
지난 6월 1일, 태오가 마침내 아버지를 향해 웃기 시작했다. 낯가림이 잦아들고 어린이집을 통해 사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몇 개월 전부터 폐렴에 걸려 몸이 성치 않던 아버지는 도착한 우리를 가볍게 맞이하신 후 당신 방이 있는 2층에서 쉬고 있었는데, 태오는 힘겹게 2층 계단을 올라 "하부지! 하부지!" 하며 적극적으로 놀이를 갈구했다. 나는 궁금했다. "(아버지는) 너를 한 번도 안아주지 않으셨어"라는 어머니의 기억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과연 아버지가 손자와 어떻게 교감할지 보고 싶었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허둥거렸다. 아이들 장난감 하나 없는 이곳에서 놀자고 보채는 손자를 위해, 아버지는 느닷없이 종이비행기를 접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접어보는 종이비행기일까. 태오의 일곱 살 위 사촌 형인 영건이를 위해 접어준 적은 있을까. 아버지는 종이비행기를 제대로 접지 못했다. 일흔 넘은 노인이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지속해온 행동이 아닌, 오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야 가능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다. 답답해진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 유튜브를 켜고 종이비행기 접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스톱 버튼을 눌러가며 더듬더듬 A4 용지를 비행기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의 둔탁해진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고, 비행기의 좌우대칭은 잘 맞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분이구나, 뼛속까지 공부만 하셨던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전에 없던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생겨났다.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며 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저술활동을 해온 사람, 하지만 어머니 없이는 은행 ATM에서 지폐 인출조차 제대로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손자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유튜브를 보며 종이비행기를 접고 있다. 나는 태오를 무릎에 앉은 채, 아버지와 마주 보고 한참을 놀았다. 태오는 나와 아버지 사이를 오가며 즐거워했고, 아버지가 어렵사리 완성한 종이비행기는 날려 보낸 후 얼마 가지 못하고 힘없이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태오는 그 모습을 보며 더 크게 웃었다. 그날 함께 식사를 하고 부모님 댁을 떠나기 전, 태오는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헤어지기 싫다는 표시였다.
25살 이후, 나의 정체성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특히 미국에서의 생활이 끝나가던 20대 후반부터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타인에 대한 태도까지, 거의 모든 측면에서 내 '색깔'이 굳어졌음을 느낀다. 이후에도 많은 일을 겪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층위에서 많은 것을 학습해 왔지만, 학습의 효과로 인해 나라는 사람의 인격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체험은 좀처럼 할 수 없었다. 조금 슬프게 말하면 성장이 멈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세상'이란, 사실 과거에 살아왔던 세상을 살짝 뒤집은 것에 불과하다. 나는 항상 아들이었다. 아비였던 적은 없었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바라봤을 뿐,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을 헤아려 본 적은 없다. 이것은 나의 아들이 태어난 후에야 가능해졌다. 아비가 된 후, 아들 태오를 대하며 끊임없이 아버지를 생각했다.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증언을 되새기며) 아버지처럼 아들을 키우지 말아야지'하는 다짐부터, '이런 순간에 아버지는 내게 어떻게 하셨을까?'와 같은 궁금증까지, 태오를 바라보는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버지가 정말 나에게 잘 못한 것일까? 내가 아버지를 두려워한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일까? 혹시 아버지를 오해하지는 않았나? 불행히도 나는 2살, 3살 무렵이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태오의 나이다. 내가 태오에게 해주는 것들을, 아버지가 내게 해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의 기억에 대해 물어봐야 하는데, 그날, 6월 1일에도 물어보지 못했다.
아빠, 태오는 고릴라를 좋아해요. 다른 어떤 동물들보다 더 좋아해요. 아빠, 나는 두 살 때 어떤 동물을 좋아했어요? 고릴라를 좋아했나요?
물어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아버지를 우러러봤다. 그가 참 커 보였고 대단해 보였다. 아버지처럼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의 매일 생각했다. 그와 캐치볼을 할 때 지나치게 긴장했던 것은, 어쩌면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스스로를 짓눌렀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너는 루나에게 너무 잘해주는 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딸에게 지나치게 잘해준다는 그의 걱정은 타당했다. 아비에게 의존적으로 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으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뇨, 엄마. 제가 루나에게 잘해주는 것은, 마음속으로 항상 태오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항상 태오를 본다. 아들을 딸보다 더 선호하기 때문은 아니다. 내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태오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보인다. 아마 아버지도, 태오를 볼 때마다 나를 생각할 것이다. 나의 아들과 나의 아버지가 어지는 순간은 그래서 항상 뭉클하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