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페인트 칠하러 가는 뇨자
벌써 한 달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이다.
헉 두 집 살림이라니 바람이라도 핀 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 내년에 이사 가게 될 집이 현재 비어 있는 상태라, 주말마다 가서 셀프 인테리어를 하느라고 그렇게 되었다. 속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참 팔자 좋은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래, 팔자 좋은 얘기지 뭐. 집 하나 사기도 어렵다는 요즘 같은 세상에 집이 두 채니 팔자가 사나운 편은 아니겠지. 하지만 실은 지금 사는 집이 빨리 팔렸으면 싶은데, 영 안 팔리고 있어 걱정이 태산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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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는 1월에 가려 한다. 아이가 1월 두 번째 주까지 학교에 나가니 방학에 맞춰서 갈까 싶다. 코로나 휴교령으로 수업일 수가 모자랐는지 1월 초에 방학을 한다는 것이다. 새 학교로 전학을 해야 하니 방학기간 동안 될 수 있으면 빨리 정리를 마치고 조금이라도 아이가 빨리 동네에 적응하도록 돕고 싶다.
하지만 그때까지 매도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집은 비워둔 상태로 떠나서 팔리기를 계속 기다려야 될 것이다. 이사 갈 집까지 편도만 1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데 이따금씩 빈 집을 체크하려면 왔다 갔다 하기도 피곤할 테고. 아니 그보다 그냥 이 꼴 저 꼴 다 싫고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 산뜻한 마음으로 새 집으로 떠나고 싶은데. 나 혼자만의 헛된 욕심이 되어 버릴까 봐 초조해진다.
정부의 대출 규제로 매수세가 한 풀 꺾이며 그다지 집을 잘 보러 오지 않는다. 누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이만큼 집값을 올려주고 이제는 뜬금없는 타이밍에 또 매수세를 확 걷어가버리는 애증의 이번 정부. 가히 사이코적이라고 밖에는 표현을 못 하겠다. 미친 부동산 정책 그야말로 맛 간 정부다.
여야 간 세력 다툼이나 정쟁 따위 나는 모르겠고, 민생과 관련된 부동산 문제는 정말이지 내 삶에 직격탄을 날린 문제이니 그야말로 감정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집 문제를 두고 대부분의 멀쩡한 사람들이라면 3,4년 뒤를 내다보며 계획을 세워서 움직이기 마련인데, 미치광이 같은 잦은 규제 정책으로 우리는 몇 번이나 계획이 수 틀어져 버렸다.
이번에 이사 갈 아파트는 2016년에 분양을 받았으니 벌써 5년 전 아닌가! 그 시절에는 조정 지역이며, 실거주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이었건만, 5년 새 스무 번도 넘게 나온 부동산 규제정책으로 꼬이고 꼬인 거주 계획은 이제 나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 밖에는 주지 않는다. 지금 집은 무조건 팔고 다음 집으로 실거주.
그래도 일찍 샀으니 망정이지 아주 조금만 늦었더라면 매도 시기 제한에 정말이지 애가 탔을 것이다. 한두 달을 남기고 반드시 등기를 넘겨야만 하는 이들이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공포에 벌벌 떨어야 할 테니까. 나같이 예민한 성격이라면 정말이지 그 모든 걸 견딜 수가 없어 그냥 무너져 버릴지 모른다. 물론 그런 나 스스로를 알기에 언제나 훨씬 미리 앞서 움직이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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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치자면 기간으로는 1년간의 여유가 있다. 하지만 나란 사람은 촉박한 타임라인에 쫓겨 일을 추진하다가는 타들어가는 속을 감당할 수 없기에 집 매도와 같은 큰일이라면 반드시 1년 정도의 여유는 두고자 한다. 3,4개월 안에 팔리기를 바라며 집을 내놓는다는 것은 가히 상상을 못하겠다. 그래서 올 초부터 혼자서 이미 시나리오를 다 짜두고 미리 사서 걱정도 한가득했다.
하지만 세월아 네월아 호가를 한참 높여잡고 언젠가는 고기가 걸려들 거라는 태도로 태평해 보이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저 밑에서부터 스트레스가 치밀었다. 예전처럼 순리대로 거래만 충분하다면야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여태껏 운이 엄청나게 좋았던지, 내가 살던 집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항상 계약이 되었다. 전세를 살 때는 매번 내 놓자마자 당일에만 서너 팀이 집을 보고 가더니 일주일도 되지 않아 계약이 체결되었다. 재작년 월세를 놓을 때만 해도 어마 무시한 입주 장에서 우리 집은 사전점검 첫날에 집을 보러 온 신혼부부가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쏴 주고 갔다. 물론 당시에도 행운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랬던 것이 이번 집 매도에 와서는 이토록 신통치가 않으니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어제 부동산에 들러 결국은 호가를 낮추고 말았다. 올해 말까지 일단 기다려보고 정 안되면 마음속에서 포기를 해야 할 듯싶다. 어떻게든 올해 안에 정리를 하고 싶었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래 영원히 아무도 이사를 안 할 것이 아니라면야 시간을 편으로 둔 자가 승자가 아닐까?
이 문제는 결국 내년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고 내 정신은 그 스트레스를 감당해 내야만 한다. 그러니 준비해둬라! 결국 3,4개월 잠을 자건 못 자 건 그때에는 결판이 날 테지. 데드라인은 반드시 있는 것이니. 반대로 운이 좋으면 저가 급매들이 정리되고 연초에는 은행들 대출 실적 때문에 다소 완화가 될 테니 되려 값이 튀어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집값이 오히려 떨어진다면? 그것도 또한 팔자다. 떨어져 봤자 어차피 내가 산 가격을 생각하면 그걸로도 감지덕지라고 여기며 마음 다스려야지 별 수 있겠나. 아무튼 나는 일 년 일찍 움직이는 사람이기에 이런 리스크 관리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내 초조증과 염려를 결코 비웃지 말라구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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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아픈 지금의 문제에서 탈출해 보고자 나는 셀프로 새집 인테리어를 하기로 결심했다. 매도 계약금이 진즉에 들어왔다면 사치스러운 기분에 인테리어 업체를 고용해 올 수리의 길을 택했을지 모른다. 대략 견적이 6천은 줘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지러운 현재의 심신으로는 무언가 걱정과 고민을 한껏 쏟아부으며 지쳐떨어질 큰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온갖 기력이 다 쏠려 감히 매도 걱정은 할 수도 없도록 나를 혹사시킬 그 무언가.
그래서 한 달째 주말마다 새집으로 가서 온종일 페인트칠을 해대고 있다. 추석에도 연휴에도 빠짐없이 가서 페인트를 칠했다. 그렇게 온 방 벽을 알록달록하게 칠하고 나니, 점점 자신감이 붙어왔다. 그래서 필름 시공하려 했던 몰딩과 문짝조차 페인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큰일을 벌이고 보니 살짝 부담이 되어 숨이 턱 막힐 때도 있다. 왜 시작을 했나 후회가 될 때도 있고. 하지만 확실하게 온 신경은 다 그쪽으로 집중되어 집이 안 팔리는 걱정을 덜 수 있었으니 나름 효과는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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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꼴 보기 싫은 거실 아트월에 템바 보드를 붙이려고 주문해두었다. 재료비만 50만 원이 넘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어차피 애당초 투자하려고 했던 비용을 생각하자면 돈이 굳는 셈 아닌가! 견적을 받아보니 34평 올페인트 시공만 1천만 원이라고 했다. 필름 시공일 경우 350만 원.
여태껏 산 페인트 가격을 다 합치면 100만 원 정도 남짓하고, 나와 남편의 노동비가 비록 priceless 이긴 하지만 금액으로는 0원에 근심 걱정 딴 데로 돌리기라는 정신적 혜택이 있으니. 결국 수지 타산이 맞는 장사가 아닌가! 덕분에 주말에 놀러나갔다면 썼을 돈이라는 기회비용도 사라졌다. 이러다 부자 되겠구먼! ㅎㅎ
지난주 3일간 페인트칠을 하도 했더니 손이 절이고 퉁퉁 부어 이러다 무슨 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기존 집으로 돌아와 한 3일 쉬고 나니 여전히 남는 게 이눔의 몸뚱어리와 노동력인디 뭐. 하~ 나 와세다 박사과정까지 한 뇨자인데 결국 이렇게 육체노동으로 페인트칠 하고 있다! 부질없구만 꿈같던 이십대여. 결국 여기서 이렇게 만날 거였다면 그동안 나는 왜 혼자서 그토록 미친 듯 날뛰었다니! 페인트를 반쯤 칠한 벽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페인트나 열심히 칠하다가 페인트계의 달인이 되었다면 한 집당 돌아다니며 천만 원 받는 삶을 살고 있을 텐데. 그러다가 스스로 찰싹찰싹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니야, 그랬다면 이렇게 집 두 채를 못 샀겠지. 세상에 성에 차는 만족스런 삶 따위가 어디 있으랴! 그저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위너이니라! 감사가 세상 사는 가장 위대한 지혜이며 최고 미덕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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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요즘 두 집 살림을 뛰며 나는 이랬다저랬다 모드로 극단의 기분을 오간다. 새집에 가서 페인트를 칠할 때는 무념무상의 긴 작업 후 피로에 몸이 쩔어 곯아떨어졌다가, 안락한 기존 집으로 돌아오면 억겁의 아득한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다가 집 언제 팔리나 부동산에 전화를 돌린다. 이토록 인생이란 게 참으로 우습다. 내 인생이 이럴 줄은 나도 몰랐는데.
하다 보니 이런 두 집 살림이 나름 싫지 않다. 집이 팔린다면 훨씬 더 승자 기분으로 이 상황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셀프 인테리어 따위는 다 때려치우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인생은 언제나 내가 승승 장구 의기양양한 꼴은 볼 수가 없는지 겸손하며 쭈그러져 있으라고 또 나를 후려갈긴다. 야 트럼프 같은 사람도 잘만 사는데 인생 너는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나 술술 풀리는 꼴을 그렇게 못보겠는거?
내일 나는 또 페인트칠하면서 도를 닦으러 떠난다. 한 땀 한 땀 도가 닦이긴 하더라. 그러고 보면 육체노동만큼 신성한 것도 없다. 인생 수련이며 자기 성찰이며 딴 데서 찾을 필요가 없다. 조금 힘들면 바로 나가떨어지고 투덜거리는 옹졸한 나의 한계도 보았다. 나는 이런 사람이로구나!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사진 남겨서 나중에 이 셀프 인테리어 시리즈들 블로그랑 인스타에 올려야겠다. 조회 수 좀 나올 거야 ㅎㅎㅎ 생각일 뿐 실천은 전혀 안되고 있지만서도. 그래도 언젠가 다 끝내면 정말 그렇게 할 테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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