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가 웃어도 괜찮아요
모닝 메시지
일관성 이라는 환상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살다 보면 우리가 예상치 못한 불가항력적인 일들, 원치 않는 아프고 또 슬픈 일들이 생겨요.
그렇다고 인생에 그런 불행이 닥친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는 마냥 우울하게 쳐져 있어야만 하는 걸까요?
나는 가난한 사람이니까 내 주제에 연애나 쓸데없는 감정은 사치일 뿐이고, 소소한 낭만이나 감성 따위는 추구할 처지가 아닌 걸까요?
나는 몸이 아픈 사람이니까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돌아다니면 안 되나요?
어둡고 진지하고 슬픔이 한가득 담긴 표정으로 집구석에만 처박혀있어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나는 선생님이니까, 회사원이니까, 엄마니까, 어른이니까...
내 속에 있는 수많은 나는 다 밧줄로 꽁꽁 묶어둔 채 오로지 사회적 역할이라는 가면을 쓴 공적인 나로서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건가요?
아니요. 나는 그냥 나예요!
그리고 그 나는 절대로 한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내 속에는 수 백, 수 천의 내가 있어요. 그리고 그 모든 나는 오만가지 감정을 언제라도 넘나들며 느끼는 존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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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적이고 똑 부러지며 규칙과 도리를 존중하지만,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기도 하고, 한없이 어리버리할 때도 있어요.
나는 쓸데없이 사치를 하지 않고 돈이면 다 된다는 배금주의는 혐오하지만, 그래도 저축이 꽤 모이면 명품 백도 지르고 외제차도 타보고 싶어요.
나는 얌전하고 숫기 없어 보이지만, 막상 멍석이 깔리면 그동안 눌러왔던 끼를 확 분출할지도 몰라요.
천성이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지만 부당한 대우는 참을 수 없죠. 당차게 따지고 대응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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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뇌는 세상을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무의식중에 패턴을 찾아내려 애쓰고 일관성의 프레임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 들죠. 그리고 어떤 것이 거기에 어긋나게 되면 난해하게 여기면서 배척하고 거슬린다고 여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은 이러이러하다'라고
짧게 한마디로 요약정리해서 두뇌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고, 그 극단적으로 압축된 단편적 정보를 바탕으로 전체를 해석하고 싶어 해요. 사실 그래야 피곤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도 사물도 어디 그렇던가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애초부터 복잡계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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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인 저희 아들이 그러더군요. 일본 놈들은 참 나쁘다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고 위안부를 부정하니까, '일본 사람'도 아니고 다짜고짜 '일봄 놈' 들은 나쁘다는 거예요.
저는 도쿄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죠.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 재미있는 사람...
1억 3천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나라를 아들이
'나.쁘.다.'
이렇게 한 단어로 규정하니까
글쎄요.
역시 아이니까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겠구나 싶다가도 약간은 씁쓸했어요. 저는 일본을 한 단어로는 규정할 수 없겠거든요. 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듯이 말예요.
그런데도 아이는 자꾸 저에게 물어요.
엄마는 그러면 일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우 씨, 저 고지식한 극단적인 녀석.
일본에서 공부했다고 일본을 무조건 좋아할 것 같냐?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싫고, 당시에는 아예 그런 걸 의식해 본적도 없이 그냥 살았어.
아이는 뭐 아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한편 어른들조차 어찌나도 단순하게 모든 걸 그런 식으로 단정 짓는 이들이 많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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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우울해.
저 사람은 부자야.
저 사람 서울대 나왔대.
저 사람 애 엄마야.
이혼했데.
나이가 오십이래.
그렇게 한 단어로 낙인을 찍어서는 프레임이라는 관짝에 들어맞도록 우리의 팔 다리를 억지로 재단해 그 속에 처넣어 버리려고 하지요.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말하곤 해요.
'아 나는 그런 건 모르겠고!'
바로 이게 에센셜리스트로서의 제 좌우명이랍니다.
단, 꼭 무식한 아저씨 버전으로 말해줘야만 된다는 것이 잊지 말아야 할 포인트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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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뭣대로 정의 내린 나에 대한 그 한마디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요?
내 안엔 수백 가지 내가 있는 건데요.
세상에 해를 입히지 않는 이상, 그 모든 나를 다 끌어내 쓴다 한들 뭐가 어떻단 말인가요?
왜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혼돈에 빠뜨리지 않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인 듯 살아야 할까요?
'아, 진짜 나는 그런 건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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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최근에 그렇게 부케 열풍이 부는가 봐요. 열풍이라고 했지만 원래부터 없던 개념이 생긴 것이 아니죠. 우리의 본질이 원래 그런 거예요. 내 안에는 진지하고 무거운 나도 있고, 가볍고 속물적인 나도 있는 거예요. 발랄하고 귀엽기도 하다가 한없이 우울하고 어둡기도 하구요.
우리는 결코 한마디로 정의되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에요. 일관된 모습으로만 살 수도 없죠. 이랬다저랬다 해도 돼요. 매일매일 입는 스타일의 옷만 입다 보니 어느새 스스로 잊어버렸겠지만, 사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옷들이 옷장에 한가득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옷 저 옷 내키는 대로 입어봐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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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벌써 몇 년 전부터 흰머리가 수두룩하게 나기 시작해요. 하나씩 둘씩 뽑다가 올해부터는 그냥 포기했어요. 강경화 전 장관처럼 멋진 은발이 되고 싶기도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백발이 진행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요. 이번 기회에 아주 밝게 염색을 하고 브릿지도 넣어 흰머리를 자연스럽게 교란시켜볼 생각이에요. 매일 새치 염색을 하는 건 영 귀찮아서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왠지 제대로 된 40대 애 엄마로서는 어울리지 않을까 봐 내심 걱정이 됐었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금발 느낌으로 염색을 하신 노년의 당당하고도 멋진 여성분을 보고 용기를 얻었어요.
까짓것 뭐 어때.
까만 머리여야만 뭐 꼭 단정하고 신뢰감이 가는 제대로 된 엄마이고, 강사라는 건가?
아 나는 그런 건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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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내 속의 수많은 나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연습
우리 이제는 이렇게 해봐요.
비일관성도 의외성도 다 괜찮아요.
몸이 아픈 사람도 예쁘고 섹시해도 괜찮아요.
아픈 아이를 둔 엄마도 멋지고 이기적이어도 괜찮아요.
불행이 나를 뚫고 갔다고 해서 마냥 우울하게 쳐져 있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부모님이 아프시거나 가난하다고 해서 나도 같이 언제나 영혼이 끌어내려지거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요.
속설처럼 방금 전 울었다가 지금은 웃는다 해서 절대 어딘가에 털 안 납니다!
스스로의 감정이나 정체성에 모순이 느껴진다고 일관성에 대한 쓸데없는 강박이나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아요.
이제 수많은 형형색깔의 방 문이 있는 긴 복도를 한번 상상해 볼까요.
각각의 방들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지의 컬러도 인테리어도 완전히 달라요. 아마 창의적인 분일수록 더 수많은 다양한 형태의 방들이 떠오르실 거예요. 이제 그 방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잠시 방마다 전혀 다른 옷차림과 분위기로 변신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세요.
이 모든 나는 언제라도 그 차림 그대로 자유롭게 밖으로 나와도 상관없어요. 당신은 팔색조 매력을 지닌 너무나도 멋진 존재니까요!
이제 복도 저 구석에 방 문 하나를 골라 열어볼까요? 그 안에는 이런 것들을 넣어두기로 해요. 틀에 박힌 일관된 모습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자꾸만 나를 짓누르는 강박과 새롭고 다양한 나를 표출할 수 없도록 만드는 내 안의 어색함과 두려움.
자, 그 방의 라이트 스위치는 이제 꺼두고 문도 쾅 닫아버리자구요! 쾅!
그 방은 필요할 때만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다지 열어볼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또다시 쓸데없는 강박과 두려움이 쌓여서 그것들을 치워야 할 때를 제외하면 말예요.
이제 여러분은 다양한 색깔의 방에서 나와 제일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외출을 나서요. 남들의 혼란과 시선은 그냥 편하게 즐기세요. 됐어, 어차피 내 인생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 주문처럼 외치세요.
"아, 난 그런 건 모르겠고!"
누가 뭐래도 여러분은 바로 에센셜리스트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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