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 친구로부터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일터에서의 나의 신념에 바탕이 되었다.
동장이 되려면 구청장만큼의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능력의 여유가 생겨서 일을 순탄하게 진행할 수 있다. <도올 김용옥의 도덕경 강해 중>
또 다른 내 친구는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동장은 딱 동장만큼의 일을 해야지, 그 이상의 일을 하는 건 호구라고 말했다. 몸은 망가지고 심리적으로는 번아웃이 와서 노예처럼 일만 하다가 결국 퇴사하고 말게 될 것을 충고하였다. 친구의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사실일 확률이 높다.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나 역시도 심리적 소진과 체력적 탈진을 겪어 결국 일터를 관둔 적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인으로서 10년 넘게 생활하면서 느껴보니 저 이야기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 일터에서의 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불안이 높은데 성취 욕구까지 있는 나에게는 더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잘 해내고 싶은데 내가 가진 능력치보다 목표가 더 높다면 좌절감을 경험하기 쉽다. 아마 일상이 불안일 것이다. 늘 부족함을 느끼고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높은 수준의 목표물은 나를 더 위축되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목표 자체를 하향 조정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목표를 낮춘 만큼 일에 대한 나의 효능감 역시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장인 내가 구청장만큼의 역량을 지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편, 최근 접한 잡 크래프팅(job crafting)이란 개념은 또 다른 측면에서 내게 도전감을 주었다. 잡 크래프팅이란 주어진 업무를 스스로 변화시켜 의미 있는 일로 만드는 일련의 활동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업무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는 잡 크래프팅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나의 일터에는 5년째 장관 시상식에서 수상자인 학생들을 줄 세우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동료가 있다. 그녀가 입사하던 첫 해시상식에서는 선임자가 시켜서 일을 맡게 되었고, 두 번째 해에는 지난 해에 줄 세워본 경험자라서 맡았고, 서너 번째 해는 경험자로서의 책임감에, 그리고 올해는 스스로 자원하였다. 줄 세우는 일은 얼핏 보면 하찮아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심장 쫄깃한 일 중 하나다. 공무원들의 행사는 약간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빡빡한 행사인데 장관님까지 대동하여 진행되다 보니 그 긴장감이란 비공무원인 사람들조차도 숨을 못 쉴 지경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초를 다투는 일정에 상을 받는 순서가 꼬이거나 돌발상황이라도 생겨버리면 버벅거리다가 행사는 엉망이 되고 만다.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학생들은 주로 역경을 딛고 성장한 학생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희망이라 부른다. 때로는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때로는 부모님의 잦은 다툼 속에서 불안한 정서를 경험하다 학교에 부적응을 경험하였던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아이들은 누구라도 부담스러울 수있는 400명 규모가 되는 시상식에서 무대에 올라 수상소감을 발표하게 된다.
그녀는언젠가 시상식에서행사를 무사히 끝낸 뒤, 혼자 벅찬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버린 기억이 있었다고 하였다.
15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100여 명의 수상을 진행하다 보니 시상식은 마치 전쟁통과 같이 치러진다.아이들은 상을 받고 난 뒤에도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소감을 발표해야 되는 상황이 되고 이 때 아이들은 한 번 더 불안감과 두려움을 직면하게 된다.
내가 진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감을 말할 수 있을까? 떨지 않고 잘 말할 수 있을까? 실수하지는 않을까? 나 때문에 시상식을 망치는 건 아닐까?
아이들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이 오간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용기 있는 학생들이지만 또 다른 도전 앞에서 다른 종류의 불안감을 재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녀는 단지 줄 세우는 담당자일 뿐이었지만 상담자의 역량을 활용하였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다는 것 자체로도 용기 있는 일이라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너희들의 성장을 축복해주러 온 사람들이고 너의 귀한 성장에 귀를 기울여주고 격려해줄 분들이라고.. 마지막까지 "선생님 저 진짜 잘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그럼~! 아까 상 받을 때에도 너무 잘했는데?? 선생님은 네가 잘할 거라고 믿지만 못해도 괜찮아. 떨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라며 파이팅을 외쳐주고 소감을 마치고 내려오는 학생들을 제일 먼저 맞이하러 나가기도 하였다. 상을 받는 학생들 전체를 바라보고 좀 더 불안해 보이는 아이들에게는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고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어렵지 않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여유가 그녀에게 있었고 비록 그저 줄만 세워도 되는 역할이었지만 시련을 딛고 희망이 된 아이들에게 용기를 더하고 싶은 좀 더 다른 차원의 역량을 통해 직무를 완수했다.
시상식을 마치며 그녀는 이 작은 역할을 담당한 자신에게 '나이기에 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에 대해 스스로를 격려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아마도그녀는 기계적으로 행사를 시작하고 마쳤다면 경험할 수없었을 성취감에 고무되어 마음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잡 크래프팅은 자신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직무를 재설계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지닌 역량을 발휘하고스스로의 만족감과 성취감을 경험하게 돕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우리 조직은, 나 스스로는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과 태도를 갖추고 있는 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