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이 발행한 이슈페이퍼에 따르면, 청소년 비행의 주요 원인은 개인, 가족, 또래 요인이며 부모 등 중요한 인물로부터 이해와 수용을 받은 경험,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통한 삶의 방향을 계획하는 일 등은 비행을 극복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재범 청소년이 뚜렷하게 증가한 핵심 요인이 사회적 낙인임을 밝히고 있었다. 범죄율은 낮아지고 있는데 재범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며칠 전, 지인과의 대화 중에 비행이 촉발되는 지점이 심리적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비행하는 또래들과 관계를 맺는 순간이 될 수 있음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만난 학교 부적응 학생이 문득 떠올랐다. 그 학생은 다문화가정 학생으로 막노동 일을 하는 아버지와 동남아권에서 이주한 어머니, 한 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 생활하고 있던 친구였는데 어린 시절부터 운동선수생활을 하였지만 고된 훈련과 강압적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여 운동을 중단하게 된 친구였다. 아들이 선수로서 성공하기를 바라던 아버지는 그 이후 학생의 학업에 집착하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로 부자 간 갈등이 깊어졌다고 하였다. 결국, 학생은 아버지와 자주 다투게 되었고, 공장에서 일하시는 이주민 어머니는 끼니 챙겨주는 일마저 급급해하셨기에 아이는 영육 간의 궁핍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가출을 시도했다. 가출 후에는 학교 밖 청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도박, 무면허 운전 등의 일탈을 반복하였다.
하지만 비행은 그저 비행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학령기에 놓인 이 학생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학교 내에서도 좋지 않은 소문들로 낙인이 생겼기 때문이다. 꿈에 대한 좌절, 가정 내 관계 갈등 등의 정서적 위기에 대한 문제행동은 처음엔 단순한 비행으로 이어지는가 싶었지만 그 이후에는 더욱 복합적인 위기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생 스스로 느끼게 된 깊은 무기력감은 학교생활에 대한 회피 성향으로 이어졌고, 결국 잦은 결석으로 나타나더니 학업중단의 위기까지 몰고 갔다. 나는 이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쁜 애들과 함께 어울려 다닐 때에는 훔치는 행동인 잘못된 행동인 걸 알면서도 그냥 재미있어서 나쁜 짓을 나도 모르게 계속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참 인상적으로 들렸다. 나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의미도 없는데 그냥 재미있어서 하게 된다는 말이다. 게다가 함께 노는 친구들이 나쁜 애들인 것도 안다는 이야기도 놀라웠다. 이야기를 곱씹어 보면서 이전에 들었던 프로이트식의 해석인 ‘도벽은 엄마의 젖가슴을 훔치는 행위’라는 말이 떠오른다. ‘친밀한 관계 맺음 욕구에 대한 결핍이 이 학생을 이렇게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간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석해 보건대, 이 학생의 비행은 곧, 의미 있는 관계를 통하여 경험되기를 원했던 인정과 관심에 대한 욕구의 좌절로 인한 심리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 청소년들에게 가장 절실한 관계는 어쩌면 부버가 이야기하는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인 지도 모르겠다.
가정 내에서 경험된 무기력과 교사, 또래로부터의 낙인으로 인해 학교 부적응과 삶의 악순환을 되풀이하였던 이 학생의 연결고리들을 끊기 위하여 우리는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어쩌면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바람직한 관계 맺기’를 통한 ‘진정한 대화’와 또 ‘더불어 함께’ 하는 긍정적인 경험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소 추상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아이들의 텅 비어있는 내면에 새롭고 적절한 삶의 가치를 채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결국 좋은 어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가정 내에) 좋은 어른이 부재한 상황에서 학교 또는 사회에서 만난좋은 어른과 함께 하는 경험을 한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잠시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남을 돕고 싶다는 선한 마음가짐으로 상담을 공부하는 우리들이 탄탄한 이론적 기반을 토대로 짧은 만남이라 할 찌라도 학생들에게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관계를 경험하게 해 준다면, 그 작은 만남 하나에도 이들의 삶이 어떠한 방향으로 틀어질 수 있을지 작은 희망의 씨앗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