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정착하고 싶었다. 학창 시절부터 부모님의 소득 없는 부동산 투자 덕에 자주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래봤자 차로 1시간이 안 되는 거리였지만, 적응하려 하면 주위의 환경이 바뀌는 게 학교를 같이 갈 친구가 달라지는 게 예민한 사춘기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대학교 6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층간 소음이 심해서, 집이 너무 좁아서, 친한 친구를 따라서. 매년 다른 이유로 다른 원룸에 살았고 겨울만 되면 거기서 거기인 동네에서 짐을 옮기느라 낑낑대곤 했다.
앞으로 4년은 무조건 여기서 살겠지. 졸업 후, 야심 찬 각오로 들어간 병원. 그러나 이 놈의 역마살은 정말 사주에 깊게 새겨져 있는 건지 1년 만에 제 발로 나오게 됐다. 인턴 수료장과 우울증을 얻은 채. 첫 직장과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고 퇴사 후 3주 만에 서울로 향하는 용달을 탔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기회의 도시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떠돌이 생활은 지겹게도 이어졌다. 동대문을 거쳐 부천, 다시 서울, 서울 내에서도 신당, 노원, 건대입구까지.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이사에 피로감이 쾨쾨이 쌓여갈 때쯤 보금자리에 대한 욕구 또한 강해졌다. 사람답게 살려면 1인당 적어도 10평이 필요하댔는데 이젠 좀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잘 때 냉장고 소음이 거슬리지 않는, 빨래를 널 베란다가 있는, 옆 건물에 가리지 않아 햇볕이 잘 드는 쾌적하고 안전한 내 집.
마침내 임장에 나섰다. 계속 수도권에 살 생각이었으니 구심점을 마련해두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 매물을 보러 다니던 2019년 초에도 이미 아파트 가격은 많이 상승해 있었다. 그나마 저렴하다는 서울외곽을 둘러봤지만 한두해 전보다 30-50%가 껑충 뛰어오른 가격에 '이거 바로 나갈 거예요.'라는 반쯤 진짜인 공인중개사의 바람잡이에도 선뜻 '제가 할게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시드가 충분치 않아 대부분 대출을 해야 했는데 생각보다 이자가 너무 커질 것 같았다. 아무리 고소득 직군에 속한다지만 그때까진 그렇게 큰 리스크를 떠안을 성격은 못됐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곤 터벅터벅 단지를 빠져나왔다.
그 후 코로나가 시작되고 넘쳐나는 유동성에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금리가 0으로 떨어지면서 돈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건 멍청한 짓이 되었고 레버리지 쓰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벼락거지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박탈감과 낙오감을 느껴야 했다.
나 역시 이대로 있다간 내 집마련은 더욱 멀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조바심이 엄습했다. 상경한 이후 집값은 계속 올라가기만 했으니까. 한편으론 너무 지쳐있었다. 몇 년째 알아보기만 하다 이미 따라갈 수 없이 뛰어버린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닭 쫓던 개 마냥 허망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 무렵 월세 계약이 만료되어 이사를 해야 했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또 원룸에 갈 것인가, 아니면 집을 살 것인가.
결국 후자를 택했다. 결정에는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는데 부모님의 바람도 컸다. 딸이 더 이상 방 한 칸에 살지 않았으면, 안전한 곳에서 지냈으면 하는. 그러나 우리 집은 평범했고 지원해 줄 자금은 없었다. 대신 일로 바쁜 나를 대리해 엄마는 인터넷으로 찾은 매물을 보기 위해 몇 시간씩 KTX 타고 처음 가는 도시를 발로 뛰어다녔다. 한두 번이 아닌 여러 번. 그게 고마우면서도 못내 싫었다.
서울에 살지 않는 우리 집이 싫었고, 증여를 받았다는 동기들처럼 턱턱 보태줄 게 없는 집안 형편이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더운 날 백팩을 메고 몇 번 타본 적도 없는 지하철을 물어서 타는 엄마가 싫었다. 열심히 알아본들 가능한 선택지가 별로 없는 현실도 답답했다. 보태주지도 않을거면서 뭔 집을 사래. 아
스트레스 받아. 그냥 원룸 살겠다고. 신경 좀 꺼. 오래간만에 마주한 그녀에게 불효 막심한 짜증을 내곤 했다. 엄마가 더 이상 올라오지 않길 바랬다. 이제 그만 고민하고 싶기도 했고.
2021년 7월, 마침내 나는 1 주택자가 되었다. 그러나 고민의 종결과 함께, 끝이 없을 것 같던 상승장도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