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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Nov 12. 2023

쉬는 게 두려운 당신에게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하나가 운행을 중지하고 막혀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막고 있는 표지판에는 ‘기기의 과열 및 피로누적으로 운행을 일시 중지 한다’고 적혀있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옆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다시 생각하니 피로누적? 기기와 피로누적이 붙을 수 있는 단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열은 말이 되는 것 같은데 기계의 피로누적이라니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기계도 피로감을 느끼나? 그건 생명이 있는 것들만 느끼는 게 아닌가? 기계는 어떻게 피로감을 느끼지? 잠을 못 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업무가 과중해서?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본다. 에스컬레이터가 기지개를 켜며 졸린 눈으로 ‘나 너무 피곤하니까 좀만 쉬게 해 줘….’ 하며 깜빡 잠에 드는 장면. 다음날 개운하게 깨어난 에스컬레이터는 밝은 표정으로 다시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퇴사한 전 회사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물론 모든 업무와 팀이 중요하지만 출판사에서 가장 우선되는 일은 책이 제 때 나오는 것이다. 성수기와 비수기가 정해져 있는 학습지는 더더욱 그렇다. 책이 제 때 나오지 않아 판매를 못 하면 그 해 매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내가 처음 입사해서 한 일이 책이 언제 나올지 관리하는 모든 일이었다. 재고를 확인하고, 판매부수를 정하고, 책 만드는 일정을 체크하고, 입고를 관리하며 물류 및 거래처와 소통하고, 입고된 책을 확인 및 등록해서 출고까지 하는 일. 책이 나오기로 한 날 나오지 않거나 파본이라도 나면 비상사태다. 해서 책 만드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제작팀과 협력이 매우 중요했는데, 그들도 언제나 날짜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예정은 언제까지나 예정이었고 하루 이틀쯤 어긋날 수도 있었다. 어떤 책의 입고예정일이 되었는데도 입고되지 않자 나를 괴롭히던 상사는 또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분명 오전에 확인했을 때 정상입고 된다고 했던 책인데 갑자기 기계가 작동을 멈췄단다. 그대로 보고했는데 그는 내게 왜?라고 물었다.      


  “왜? 기계가 왜 멈춰?”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 과열돼서 그런 것 같다고…. 확인 중인데 아마 오늘 입고되기는 힘들 것 같다는데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위축됐다. 그녀가 소리 지르기 시작하면 나는 언제나 심장이 콩알만 해졌고 콩알만 해진 심장은 엄청 빠르게 뛰어서 숨쉬기가 버거웠다.      


  “아니, 기계가 멈춘다는 게 말이 돼? 기계는 기계잖아. 기계가 멈추지 말라고 기계 아냐? 기계가 힘들다고 멈추는 게 말이 되냐고!”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기계란 원래 그렇게 돌아가라고 만든 거니까. 그러나 기계가 멈춘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열심히 대비해도 막을 수 없는 갑작스러운 고장이 있다. 기계가 멈춘 이유를 물을 게 아니라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어이없어했다. 그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다른 문장들이 떠올렸다. 몸이 아파 끙끙거리면서도 꾸역꾸역 일을 했던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만 힘들어? 다 힘들어. 여기 안 힘든 사람 있어? 나도 아파. 너만 아프냐고. 힘들고 아프다고 일 안 할 거야?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해?”     


  분명히 억울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내가 해야 할 일은 하고 있었다. 구역감이 있는데도 화장실 한 번 못 가고 모니터 앞에만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나를 기계처럼 여겼던 걸까. 아프고 힘들어도 멈추지 않고 움직여야만 하는.          


  기계의 피로누적이 무슨 뜻인지 안다. 기계의 모터를 계속 가동하면 당연히 열이 나고, 한시도 쉼 없이 돌아가면 과열이 반복될 것이고, 기계도 수명을 다하게 되겠지. 운행을 많이 해서 뜨거워진 모터를 식히고 쉬어주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명이 없는 것도, 어떠한 감정이나 육체적 정신적 한계가 없이 그렇게 줄곧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것도 피로가 누적된다는 말이다. 간간히 쉬어줘야 한다는 말이다. 하물며 인간은 어떤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명확한 한계가 있는 인간들은 눈에 보이도록 피로감이 누적되는데 제대로 쉬어줘야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쉼을 너무 간과하고 쉬는 것에 죄책감을 가진다. 이렇게 쉬어도 될까, 이러다 너무 뒤처지면? 다른 사람들은 다 열심히 사는데 나만 이렇게 쉬면? 불안해하며 과열된 몸과 정신으로 계속해서 작동한다. 스트레스와 피곤은 쌓이고 쌓여서 결국 여기저기서 문제가 발생하고 작동이 멈추고서야 문제를 발견하지만 그땐 너무 늦는다. 더 이상 고치기도 힘든 상황이 되기 전에 미리 점검해서 쉬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쉼은 쉽게 볼 것이나 죄책감을 가질 영역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매우 중요하다. 쉬는 시간에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과 의지를 얻는다. 우리는 쉼을 제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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