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자라는 순간들
모든 면에 있어서 잘 하고 인정 받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하며, 내 자신을 채찍질 하며 아까운 인생을 살아왔다.
남들이 봤을 때 그럴 듯한 성취는 나 자신도 뿌듯해 하지만, 남들이 봤을 때 그저 그런 성취는 감추기 바빴다.
이런 나의 습성은 아이의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내가 맞춰놓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꾸중과 비난과 격려와 회유 등 온갖 달고 쓴 방법을 동원해 내가 기대하는 수준에 ‘맞춰 놓으려’ 했다.
아이는 동네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레벨시험은 잘 본 덕에 좀 잘하는 친구들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막상 들어가고 보니, 같은 반 친구들이 너무 잘 해서 실력 차이가 많이 났다. 아무래도 레벨 테스트의 변별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시험을 치고 온 날이면 은근히 아이에게 경쟁심을 부추겼다.
“너보다 잘하는 친구들 보면 부럽지 않아? 너도 잘 하고 싶지 않아?”
“나도 잘 하고 싶지.”
“그럼 좀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집에서 예습복습도 좀 하고. 가만히 있으면 절대 잘 할 수 없어.”
“알았어, 더 열심히 할게.”
아이의 공부 정서도 걱정이 되었다. 주변에 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하게 되면 자극도 받겠지만 오히려 포기를 해 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
나의 열등감이 또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아무래도 반이 잘못 배정된 것 같아요. 아이가 혼자 너무 뒤쳐지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하는 아이들 보면서 또 자극 받아서 잘 할거예요.”
“자극을 전혀 받지 않는 것 같은데요?”
“사실 ㅇㅇ이는 다른 친구들이 잘 하면 칭찬해 주기 바빠요. 본인 스스로에게도 만족하는 것 같고요. 하지만 수업 시간에 정말 재밌게 잘 하고 있으니 걱정 안하셔도 돼요.“
처음에는 질투나 경쟁심이 없는 것이 꽤 서운했다. 그게 있어야 사회에 나가서도 치고 올라갈 수 있는데. 남자아이가 저렇게 말캉해서 뭘 할 수 있겠어.
하지만…내심, 뭔가, 아이가 멋져 보였다.
자신이 속상할 법도 한데, 친구들을 칭찬해 주다니. 그의 칭찬은 분명 겉으로만 보이는 가식적인 칭찬이 아니라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칭찬이다.
물론 속상한 마음도 있겠지만 연연하지 않는다.
최근 주말에는 가족 대항전으로 친구네 가족과 축구 경기를 했다.
그 친구네는 모두 축구에 진심인 가족으로 다들 축구를 잘 했고, 우리 가족은 구기 종목에 약한 편이라 승부는 이미 예상되어 있었다.
극적인 드라마 없이 친구네 가족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중간 중간 아이가 속상할 까봐 다독여 주었다.
경기가 끝나고 힘들어서 쉬고 있는데, 아이가 친구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아이는 드라마 처럼 “ㅇㅇ아, 좋은 경기였어.”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에게는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열등감은 다행히 나만 가지고 있었다.
나만 내려놓으면 되는 문제인 것이다.
열등감은 결과중심적 사고가 낳은 비극이다. 열등감은 모든 것을 비교하게 만들고, 그 비교는 불행의 씨앗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나 자신의 존재만으로 감사하고, 내가 무언가를 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며, 거기서 나오는 결과는 어떤 결과이든 받아들이고 그 결과를 만든 나 자신을 응원한다.
그 결과를 만든 나 자신을 응원한다.
나는 결과에 따라 나 자신을 응원하기도, 비난하기도 했는데, 무조건 응원하는 게 정답이었다.
서툴고 실수하고 내 기준에 못 미치는 나를 누구보다 응원해 줘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생각회로를 이렇게만 돌려놓아도 삶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다.
생각의 중심을 나에게로 맞춰놓으니, 거짓말처럼 열등감이 아무것도 아닌 일 처럼 느껴졌다.
앞으로도 스멀스멀 올라오겠지만 그때마다 생각의 각도를 나에게로 맞춘다.
나의 존재에 감사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즐기며, 어떤 결과든 나를 응원하고 위로해 준다.
열등감을 내려 놓으면, 행복한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