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횡재한 기분입니다.
뜯지 않은 김 한 봉지가 그대로 식탁에 놓여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작은 딸이 먹고 남긴 식탁을 물려받습니다.
식구 중에 아침밥을 챙겨 먹는 사람은 작은딸과 저뿐입니다.
두 사람이 비슷한 시간에 집을 나서는 날은 식탁을 함께 합니다.
누가 차려내든 바쁜 아침시간 가급적 간단히 먹고 집을 나섭니다.
최근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작은딸이 새벽같이 집을 나섭니다.
어쩔 수 없이 딸아이는 혼자 먹는 아침식탁에
제대로 손도 대지 못하고 급한 식사를 하고 출근하곤 합니다.
그러면, 먼저 출근하는 아이를 보낸 후
분주한 가족들의 출근시간, 식탁을 다시 차릴 것 없이
그 식탁을 그대로 물려받아 내가 식사를 합니다.
요즘 우리 집 아침 풍경은 작은딸이 웃어른이 아니지만
식탁을 내가 물려받아 대궁밥을 먹습니다.
대궁밥
국어사전에 보면 먹고 남긴 밥이라 쓰여있습니다.
문화사전에는 웃어른이 먹고 남은 음식을 아랫사람이 받아서 먹는 식생활 풍속이라 적혀 있습니다.
대궁밥은 남긴 밥이라는 뜻 보다 물려받아 다시 차려 낸 정갈한 밥이라는 뜻이 더 어울립니다.
대궁밥을 존중과 배려라 설명하기도 합니다.
가장 웃어른 상에 푸짐하게 차려진 반찬들을
어른들은 배부르게도, 지저분하게도 드시지 않습니다.
적당히 드시고 뒷사람을 배려하며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남긴 식사들이 모두에게 나눠질 수 있도록
푸짐한 밥상을 눈으로 즐기고 물려주십니다.
혹여나 고춧가루나 먹었던 양념이 남은 밥에 묻을까 조심하며 식사했습니다.
임금의 밥상도 그러했습니다.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팔도의 진귀한 식자재들을
임금 혼자 독식하지 않고 물리셨습니다.
이렇게 물린 임금의 수라상은 궁중의 나인들에게 이르기까지
물려 내려져 궁중의 모두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공동체의 어른에 대한 존중과 아이에 대한 배려를 잘 설명하는 것이
대궁밥이라 합니다.
대궁밥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쌀밥이 귀하던 시절
집에 방문한 손님에게 쌀밥 한 그릇을 대접하며
엄마는 손님이 남기시면 아이에게 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손님은 눈치도 없이 식사를 멈추지 않고
반찬들을 싹싹 긁어먹고
마지막에 남은 밥에 물을 부어 말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엄마와 함께 숨죽이고 기다리는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는 이야기
아마도 대궁밥은
풍족하지 못한 사회에서
분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존중과 배려를 통한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추구한 선조들의 지혜인지 모릅니다.
풍족하지 않은 시절 대궁밥은
한 번의 차림새로 풍족해 보이는 허세의 밥상을 꾸밀 수 있었고
한꺼번에 차려낸 덕에 풍족한 밥상을 모두가 누리는 지혜였는지 모릅니다.
더 이상 대궁상을 물려주지 않는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먼저 받은 잘 차려진 밥상은 독점을 해 버리고
다음 사람은 더 이상 배려 하지 않는 세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는 풍족해지고
분배의 방식 만이 옳은 방법이 된 것 같습니다.
배가 불러 먹지 못하고 버릴 망정
내 몫은 반드시 챙기고자 하는 사회
이것이 과연 올바른 분배의 정신일까 싶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 봅니다.
아이가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개의 보리떡으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였다는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이 말했던 잘 준비된 분배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대궁상은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
사랑하는 가족 공동체 안에서
매 끼니마다 일어나는 기적의 장면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