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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밀 Jan 08. 2023

쓰지 않을 자유, 쓰는 이유

다짐없는 새해


내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으면
소설을 결코 쓰지 않겠죠


소설가 박완서의 말이다. 그녀가 겪은 근원적 슬픔, 기나긴 생의 터널, 그리고 말과 글에 드러나는 결연함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해소에 대한 목마름은 그에게도 있었다.

말 한마디로 가려운 데를 속시원히 긁을 수 있다면 나 역시 글 쓰는 취미 같은 건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 맴도는 말의 근원지를 찾는 일은 결국 계속해서 쓰게 만드는 단단한 자원이 됐다.


 제때 입 밖으로 꺼내야 할 말이 애석하게 타이밍을 놓쳐 애꿎은 머릿속만 헤집을 때, 너의 답에 대한 나의 침묵이 결코 동의를 뜻한 바 아니나 함구의 대가로 암묵적 동조로 비춰질 때 돌아서면 어김없이 뭐라도 쓰고 있었다. 미결로 영영 남겨지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종결해버리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결국 내 쓰기의 동력은 억울함에서 비롯된 낮은 날갯짓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온전한 마음을 토로할 때 누군가는 취중의 힘을 빌려 어렵사리 용기 내고, 또 누구는 거침없을 뜨거운 논쟁을 즐기지만, 나는 대부분 한 발자국 물러서 글을 쓰는 쪽을 택한다. 모두가 각자에 편한 방식을 찾아가는 것 뿐이다.


 헛된 말들이 난무할 때, 생색과 겸손이 빈번히 교차하여 적잖이 혼란스러울 때 은은하게 뼈 있는 일침을 사뿐 날리고 싶지만 이상과 현실은 자주 달랐으니까.

오디오가 비는 틈을 못 견딜 때마다 뭐라도 채우느라 진정성에 물음표 찍히는 대신, 머릿속에 명상 앱 하나 깔았다 생각하고 편백 숲이라도 거닐 듯 가벼이 비워보면 어떨까.


제주, 서귀포시 어딘가


 긴 겨울의 적요를 까마득해하며 남은 추위를 견디려 옷가지를 겹겹이 꺼내어 입는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매서운 한기를 견디다 만나 지금 곁에 있는 이들과는 좀 더 따뜻한 말들을 주고받고 싶다.


 끝날 줄 모르는 감염병이 여전한 기승을 부리고, 4년은 족히 암담한 뉴스를 접할 것이며 계획표 루틴쯤은 자주 일탈하는 초등 겨울방학의 초입에서, 무질서한 마음을 걷어내기 위해 안간힘 써보는 새해 첫 주말이 저문다. 해가 바뀌어도 내게는 여전히 써야할 날들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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