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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밀 Dec 07. 2022

페이지를 넘길 때 우리가 놓치는 것

캡처에서 유영하기


 책을 읽다 유독 와닿는 구절을 만나면 급히 휴대폰 카메라를 켠다. 뇌의 각성이 얼마 버티지 못하는 건 경험치로 알고 있으니 사진첩에 박제하며 순간의 목마름을 달랜다.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찍는다고 활자의 포즈가 달라지진 않으나 공들여 서너 컷 정도를 남긴다.


 개중에 유독 살아 숨 쉬는 활자가 포착된 컷을 골라 지인에게 건네본다. 대화를 이어간다. 캡처된 페이지가 다시 말을 걸어온다. 누군가는 저자에 대한 궁금증으로 옮겨가며 시일 내에 책을 구해 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씁쓸한 동조와 더욱 쓰라린 현실에 덩달아 분노하기도 하며, 끝내 말을 아끼는 이도 있다.


 다시 책을 펼친다. 분명 어제와는 다르지만 왠지 비슷하게 사무치는 몇 마디를 발견하고는 또 한 번 멈춘다. 문장의 앞뒤 맥락을 유추하게끔 최소의 단락이 담기도록 장면을 찍는다. 여백은 두지 않는다. 활자가 유영하다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듯한 압도적 존재감을 여지없이 느끼는 게 신기할 뿐이다.


 주섬주섬 누군가에게 보낸다. 무수히 반복한다. 계속하다 보면 결국 내가 즉각적이며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실체가 드러난다. 드디어 알맹이를 찾았다. 끄집어내어 기록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 비슷한 알맹이를 또 발견한다. 전에 없던 각성임을 확신하며 사진첩에 박제하는 수고를 일삼는다. 한 곳에 모아보니 각 페이지들은 서로 닮은 구석을 견주며 하나의 줄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어떤 글귀 앞에서 주저앉아 물개 박수치고 싶을 때 별다른 구애 없이 머무는 곳은 캡처된 정지화면이다. 한번 덮은 책을 다시 불러오기엔 미지의 책과 영상이 범람하니 쉽게 되감기 할 수 있는 곳으로 훌쩍 다녀오는 쪽을 택한다. 그저 눈에 담았을 뿐인데 다시 보는 감회에 피로마저 가신 기분이다.


 최근 앨범 목록을 보면, 아이들 사진 중간중간에 캡처 페이지가 첩첩이 쌓여있다. 빼곡하면서도 적당히 규칙성을 갖는 모양새가 어쩐지 밀푀유나베를 떠오르게 한다. 축소해서 볼 때마다 배추와 고기가 겹겹이 쌓아 올린 푸짐한 상차림의 그것이 자동으로 연상되고는 한다.


 꾸역꾸역 쌓아올린 하루의 해가 저물 때면 생각한다. 내일의 너는 지나간 것으로부터 결국 또 얼마만큼 멀어지게 되고 마는지. 까맣게 잊히기 전에 꺼내어 볼, 마음 속 정지화면 하나쯤은 단단히 품은 날들이 소리없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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