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순간 필요한 것
얼마 전 지인들과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뜻밖의 '커피 오마카세'를 경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특선요리 혹은 주방장에게 일임을 뜻하는 '오마카세' 열풍이 음식뿐 아니라 커피 문화에까지 스며든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프랜차이즈 카페(의 기프티콘)에 절여진 나는, 전문 바리스타의 로스팅을 여유 있게 볼 기회와 인내가 없었고 원두에 관한 편력이 부족하기도 하여 그저 산미가 강하지만 않다면 냅다 받아들이는, 커피 장벽 같은 건 없는 평이한 부류에 가깝기 때문이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이곳은 사장님의 차분한 선곡력이나 테이블 곳곳 흐드러지게 핀 생화의 매력이 돋보이는 길모퉁이 인근 카페다.
그날도 나는 특별할 것 없는 카푸치노를, 일행들은 플랫화이트를 주문했고, 우리는 클래식 채널 브금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볼륨으로 잔잔히 대화를 이어갔다.
실내에 금세 고소하고 묵직한 원두향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곧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우리 테이블로 향하는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커피 외에도 웬 주둥이가 긴 드립포트 두 개를 함께 가져오고 있는 게 아닌가.
이윽고 롤러코스터처럼 좁고 길게 구부러진 곡예길을 통과한 액체가 미끄러지듯 잔을 채우는 광경을 숨죽여 관람했다. 실로 고요하고 적막한 러닝타임이었다. 정종을 따르듯 정성스레 정량의 스팀밀크를 채운 그는, 지금 즉시 한 모금 시음할 것을 권했다.
'아..커피 오마카세란 아마도 이런 것이겠구나'
당황했지만 침착한 얼굴로 일단 한 모금 입을 축였다. 커피 진입장벽 낮은 내겐 늘 먹던 그 맛이었다. 흡족한 리액션으로 보답하고 싶었으나 소박한 내 추임새로는 커피 명장을 감동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요란하지도 그윽하지도 않은, 추릅-하는 홀짝임을 듣고 난 후에 두 개의 드립 포트를 든 그는 홀연히 우리 테이블을 떠났다.
그가 자리를 뜬 후에야 궁금해졌다. 왜 포트는 두 개였을까. 커피의 브루잉 온도와 발현 시간이 되게 중요한가 보다. 그렇다면 하나는 우유의 부드러운 풍미를 위해 65-70°c의 끓는점에 충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식힌 것인가. 그도 아니면 저지방 우유이거나 물일 수도 있겠지. 커알못은 그날 이후 의혹만 키우다가 얼마못가 또 시들고 만다.
바쁜 우리 사이에는 특별히 시간을 내어 보전하고 싶은 순간이 있고, 커피를 매개로 그 순간을 불러온다. 잠시나마 그렇게 세상의 잡음이 사라지는 고요함을 그리워한다. 다시 그 카페를 찾는다면, 그가 선사한 짧은 동안의 열중과 성의에 새삼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사진: Unsplash@nathan_ dumlao